장작가의 창작소설

WRITERJANG

소박한 글쓰기

단편

위장결혼 - 단편소설 -

writerjang 2023. 1. 3. 17:52

  어느 무더운 여름 오후, 언니는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로 햇볕을 모두 차단시킨 거실에 넋을 잃고 주저앉아 새까맣게 변색된 한쪽 눈에 달걀을 정성스럽게 문지르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는 낡은 시민아파트의 거실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의 사막기온을 견디다 못해 일그러진 플라스틱 모양으로 늘어져 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나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언니는 가냘프게 흐느끼며 달걀 손을 느릿느릿 원형을 그리며 놀리고 있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나는 놀라움에 한참을 그렇게 장승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손찌검까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느닷없는 출현을 눈치챈 언니는 어느새 끝이나지 않을 같던 손놀림을 멈췄고, 이상 흐느낌도 없이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련히 꿈만같은 몽롱한 세계를 떠돌다 번뜩 정신을 차리고보니 그렇게 칙칙한 어둠속에서도 뭔가 제자리에 있어야 물건들이 죄다 바닥에 패대기쳐져 있는 거실의 풍경이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부리나케 창가로 달려가 블라인드를 걷어제끼자, 널부러진 쓰레기 더미 위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있던 언니는 갑작스레 들이치는 햇빛에 눈이 부신 양미간을 찌푸렸다. 눈가엔 굵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동시에 온몸을 웅크려 암탉이 알을 품듯이 굼뜬 동작으로 달걀을 감추며 나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아무런 흐느낌도, 어떠한 움직임도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뚜렷한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욕지거리가 섞인 언어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튀어나오려다 말고 다리는 어느새 방을 향해 걸음으로 줄달음쳤다. 자업자득이지, 좋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살라고 했어?

 

  몇 시간째 방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다가 워낙 사위가 고요해 거실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이내 문을 박차고 나와 거실로 향했다. 언니는 여전히 자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저녁 내내 언니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참혹한 전쟁터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저녁상을 차리는 동안에도, 그리고 밥을 먹을 때까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침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벽시계의 바늘은 저마다 앞을 다투며 열두시 고지를 향해 엎치락 뒤치락 힘겨운 경주를 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상황을 참다 못해 나는 언니에게 다가가 무겁게, 그리고 단호하게 한마디 던졌다.

  "이제 그만 끝내."

  "……."

  언니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고개만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볼 다른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 이상 인간의 횡포를 두고 수가 없어. 그냥 깨끗하게 단념하고 옛날처럼 나랑 둘이 살면 되잖아."

  "……"

  여전히 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날이 갈수록 언니는 자신의 폐쇄된 공간 속에서 초라하고 비참한 몰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넋이 빠져버린 사람처럼 허공만 쳐다보는 언니의 모습을 요즘들어 자주 목격하곤 했다. 예전과 달리 말수도 부쩍 줄었다. 밤마다 희망에 부풀어 나누었던 수많은 대화들도 이젠 머나먼 옛날의 추억거리로 퇴색하고 말았다.

 

  "갑자기 귀머거리라도 된거야, 아니면 벙어리라도 된거야. 대답을 못해."

  소리를 힘 닿는대로 질러봤지만 언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 해봐, 언니……."

 

  내 얘기가 들리기는 하는 같은데 언니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눈동자의 초점도 나를 응시하지 못하고 허공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뭔가 뇌리를 번뜩 스쳐갔다. 혹시, 실어증? 그리고는 밤늦도록 언니의 말문을 터트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써봤지만 역시 허사였다. 우선 충격을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잠을 청했다.

  이튿날, 창문에 가득찬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깨어나보니 언니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거실로 달려나왔다. 언니는 어제와 똑같은 자세로 바닥에 주저앉아 현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걸어봤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우선 급한대로 택시를 불렀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언니는 차에 타지 않으려고 했다. 억지로 떠밀다시피 해서 자리에 앉히기가 무섭게 택시는 병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발랄하고 누구보다 삶의 의지가 강했던 언니의 모습은 2 6개월 ' 인간' 만난 이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아니었다. 가식이든 아니든 처음엔 진짜 부부처럼 언니를 끔찍히 아껴주는 자상한 지아비 같아 보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느 곳에도 의지할 곳이 없던 우리 자매에게 그는 때로는 오빠같이, 때로는 아빠같이, 그리고 때로는 애인같이 깔끔한 말솜씨와 따뜻한 행동으로 허상을 심어주었다. 정도면 언니의 짝이 되어도 좋을 같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다. 비록 그를 형부라고 불러본 적은 번도 없었지만.

 

  두 사람은 남들처럼 연애로 만난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매로 결혼한 관계도 아니었다. 언니는 때문에, 그는 영주권 때문에 이민브로커를 통해 어쩔 없이 서류상으로 만나 집에서 사는 위장할 수밖에 없는 가짜 부부였다. 그러나 잠자리만 따로 쓴다는 뿐이지 사실상 함께 사는 식구나 매한가지였다. 위장결혼을 적발하기 위해 이민국에서 불시에 방문조사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심지어는 상대방의 속옷 색깔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정도로 감시가 심할 때였기 때문에 그는 우리 아파트 신세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간사 없다더니 세월이 흐르면서 두사람은 어느새 가짜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오래된 부부처럼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서로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뒤에도 여전히 그렇게 부부생활을 지속시켜 갔다.

 

  언니와 내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지내던 보금자리로 낯선 그가 이민브로커와 함께 찾아온 날은 유난스럽게도 겨울비가 하루종일 부슬부슬 내렸다. LA 한인타운 외곽의 자그마한 아파트까지 찾아오는 길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으리라. 주차할 공간을 찾느라 헤맸는지 사내의 머리에는 잔잔한 빗방울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들의 방문을 지켜보던 가슴이 저려오는 아픔을 참을 없어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언니도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로 달아나버리고 싶었다. 그토록 말렸건만

 

  간간히 들려오는 그들의 '작당모의' 귀에 거슬려 이불을 뒤집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말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불야성의 정마담 소개로 찾아왔다는 이민브로커는 언니에게 다짐을 받기 위해 먼저 화두를 던졌다.

  -미혼이신데 후회 없으시겠어요?

  -. 다만 약속한 금액만 확실하게 맞춰주신다면…….

  -물론이죠. 계약만 성사된다면 오늘이라도 바로 지불하겠습니다. 그렇죠 박사장님?

  -…….

  박사장이라 불리운 낯선 사내는 말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과묵한 그의 첫인상이 언니에겐 결코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다가왔다. 평범하면서도 모나지 않게 생긴, 그리고 훤칠한 키에 적당한 체격인 그의 외모도 그다지 반감을 만한 구석이 없었다. 다만 나는 그에게 붙여진 사장이란 단어가 요즘엔 주로 뚜렷한 직업이 없고, 볼일 없는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호칭이란 생각에 괜히 귀에 거슬렸다.

 

  언니는 당시 돈벌이가 그다지 적지도 않았는데, 그보다는 수입이 많은 목이 좋은 옷가게를 하나 사려고 봐뒀다며 날마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아마도 내게 보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언니의 배려였으리라. 그동안 목표를 세우고 착실하게 모았지만 아무래도 가게를 장만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던지 언니는 한목에 목돈을 마련하는 방법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언니의 귀에 들려온게 바로 위장결혼이었다.

 

  미혼이었던 언니가 생면부지의 낯선 사내에게, 그것도 결혼경력이 있는 사람에게 적을 올리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은 갈등의 과정을 거쳤을 터였다. 나에 대한 언니의 모성애가 어려운 결심을 가능하게 했다. 십이년이란 나이차 탓도 있겠지만 남들이 언뜻 언니와 나를 모녀지간으로 착각할 정도로 언니는 자기 나이보다 십년은 들어 보였다. 모진 세상과 맞서 살아온 고된 투쟁의 흔적이었다. 언니라는 존재는 내겐 어머니와도 같았다. 학교는 이제 그만두고 돈을 벌겠다는 나를 끝까지 설득해 대학까지 보낸 언니는 어느 조그만 꽃가게의 점원으로, 야식당의 웨이트리스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돈버는 데만 힘을 쏟았다. 어린 기억에 언니는 날마다 이백불이 넘는 팁을 벌었다고 자랑하며 구겨진 달러를 밤새 세고 세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잊혀지질 않는다. 스무살의 철없던 대학생이 언니의 벌이를 단순하게 열심히 일한 대가려니 하고 고지곧대로 받아들였으니

 

  뒤늦게 알았지만 언니는 꽃가게도 야식당의 점원도 아니었다. 이슥한 , 화려한 네온불빛 아래 흥청대는 룸싸롱에서 뭇남성들을 상대하던 접대부였다. 그러나 한번도 언니의 직업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언니가 인간의 무자비한 학대와 착취를 견디다 못해 최후의 수단으로 술집에 다시 나가기 시작할 때까지도 언니의 지난날의 직업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개업한 일년도 안된 조그만 한식당마저도 인간의 무지막지한 탕진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 결국 물건 값을 조달하지 못하는 악순환을 거듭한 끝에 헐값에 처분되었다.

 

  어제도 초췌한 모습으로 거리를 헤매다 돌아온 인간은 구걸하다시피 언니의 주머니를 갈취해갔다. 이제는 집안 세간까지 뒤집어 엎는 포악한 행태마저도 서슴지 않았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니까?

  -…….

  -그동안 날려버린 얼만데, 반타작은 해야 아냐?

  -정말 이젠 푼도 없어요

  -이게 그래도?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폭력사태. 언니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니, 힘이 남아있었다 해도 언니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언니는 항상 그에게 뭔가 빚지고 산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랬다. 언니는 언젠가부터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가 어떤 행패를 부려도 결코 저항할 줄을 몰랐다. 그의 타락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언니의 굴종의 수렁도 더욱 깊어만 갔다. 마약보다도 끊기 어렵다는 도박에 빠진 그를 구원할 길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가 이사온 날부터 언니와 나만의 보금자리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브로커와 함께 방문한 일주일만에 모든 서류상의 절차를 끝내고 아파트를 다시 찾은 그가 가지고 짐이라곤 달랑 이민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처음 봤을 때보다도 심하게 꺼칠해진 턱수염과 덥수룩해진 머리칼, 그리고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나타난 그의 모습에선 심한 번뇌가 뭍어나왔다. 그도 이런 방법까지 써가며 영주권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먹서먹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려는듯 집주인답게 언니가 먼저 침묵을 깨고 인사를 건넸다. 현관을 들어선 그를 환영하는 언니의 환한 미소 앞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그의 표정엔 멋쩍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초라한 그의 이사는 우리에겐 불편한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우선 언니와 내가 쓰는 하나밖에 없는 침실은 남자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 치장을 해야만 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두사람의 억지 미소가 역력한 가짜 결혼사진을 액자에 담아 가지런히 세워 놓았다. 화장대에는 남성용 스킨로션을, 옷걸이에는 남성용 잠옷을 보란 듯이 걸어 두었다. 물론 전시용일 뿐이며 그가 쓰는 물건은 아니었다. 모두 브로커가 시킨대로 언니가 구해다 놓은 것들이었다.

 

  반대로, 거실 한구석에 놓여진 그의 침대에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어린이용 시트와 베개 세트를 장식해 두었다. 내가 쓰는 침대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해에 이미 성년이 처녀의 침구세트라고 보기에는 과장이 너무 심했지만 이민국의 조사에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는 대번에 알아볼 있도록 하는게 좋다는 브로커의 얘기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는 이런 상태로 살아야만 했다. 빨라야 6개월이나 8개월 정도의 기간동안…….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다. 불편은 애초에 외갓 남자와 집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침실이 하나밖에 없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만약 그가 진짜 형부였다고 해도 불편했을텐데 하물며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람인데……. 어쩌다 집안에서 그와 마주치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떤 얘기를 꺼내야 할지 그저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단지 순간순간의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한 지극히 의례적인 목례만이 오갈 뿐이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선지 그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고 세상이 잠에 취한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들어와 자곤 했다. 무려 두시간씩이나 출근 시간 전에 일터에 도착했고 퇴근 이후는 타운 어디선가 배회하며 시간 때우기로 한달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느닷없이 언니는 그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어차피 집에서 생활하게 이상 서로 인사도 나누고 어색한 분위기도 바꿔보자는 언니의 발상에서 비롯된 자리였다.

 

  여전히 서먹해 하는 그에게 언니가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불편한 점이 많으시죠?

  -아니, 저야 괜찮지만 분이 …….

  -그럼 됐어요, 저희는 신경쓰지 마시고 마음만이라도 편하게 지내세요.

  -고맙습니다.

  다분히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시작된 만찬의 대화는 간단한 반주를 곁들여 한잔두잔 술기운이 보태지면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 갔다.

  -어쩌다가 미국까지 오게 되셨어요?

 

  언니의 질문에 뒤이은 그의 대답. 그것은 진정 한편의 인간승리의 드라마였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무용담을 차분하게 털어놓았다.

 

  죽지 못해 결심한 미국행. 하루에도 건씩 언론에 오르내리는 중소기업 사장과 가족들의 집단 자살사건. 정부는 건실한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며 하루에도 수십가지 정책을 만들어 발표했지만 실상은 대국민 언론플레이에 지나지 않았다. 은행은 유망 중소기업에게 우선적으로 사업자금을 대출해주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실상 중소기업에겐 은행의 문턱이 높기만 했다. 그는 이런 험난한 세파의 피해자였다.

 

  기업하는 사람들 모두가 어렵다고 이구동성으로 떠들며 뒤로 한발 후퇴하던 와중에도 이제 서른을 넘어선 젊은 중소기업가가 이끄는 외인부대는 오로지 전진밖에 몰랐다. 사장인 그를 포함해 타이어 업계에서만 5 이상 잔뼈가 굵은 삼십대 안팎의 젊은 4인방이 결의를 모아 세운 타이어 재생공장. 그가 이미 경기도 남양주시 외곽에서 몇년전부터 운영해오던 타이어 가게를 개조해 만든 공장과 새롭게 꾸민 연구실에서 이들 4인방은 더욱 질좋은 타이어 재생에 몰두했다. 한국 최고의 타이어, 전세계로 수출되는 메이드 코리아를 꿈꾸며.

 

  이들은 피땀어린 노력 끝에 폐타이어는 재생이 불가능하다는 그간의 통설을 깨고 고품질의 타이어를 재생산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저가격에 고품질의 타이어가 시장에 나오자 전국 각지의 타이어 수리점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그러나 시판 한달만에 시청에서 산업폐기물 처리 문제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보름 나온 결과로 인해 공장의 가동을 전면 중단해야만 했다. 질소액을 섞은 고열의 용광로에서 발생하는 질소산화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공해를 유발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처 점검하지 못한 부분에서 일이 터진 셈이었다. 재활용으로 ()공해 산업에 투신한데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가졌던 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 동안의 밤샘작업과 한푼두푼 긁어모은 투자가 모두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 허탈감에 빠진 4인방의 멤버들은 아쉬움을 남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는 백여명의 직원들에게 "공장을 재정비해서 다시 부를 때까지 일단 각자 살길을 찾아보자"' 눈물을 머금고 마무리를 지었다. 공장은 가동을 멈춘상태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그리고 그의 정처없는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전국의 산이란 산은 오르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고, 인적이 드문 강변에서 자연을 벗삼아 낚시에 빠져보기도 했다.

 

  그렇게 일년여 동안 산으로 강으로 다니며 한량생활을 하던 경기도 구암리 인근 낚시터에서 거처를 정하고 낚시에만 몰두하던 때였다. 토요일 오후는 대도시의 낚시꾼들이 대거 몰려드는 시간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저녁 별이 하늘가를 수놓은 한밤중, 그는 낮에 미리 차지한 명당 포인트에 앉아 검푸른 강물위에 깜빡이는 야광찌를 지긋이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서울서 듯한 우유빛 피부의 대학생들이 한밤의 적막을 깰까 두려워 낮게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들의 대화로 봐서 명문대 화공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이 분명했다. 그들은 지난주에 치른 학기말 고사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악몽같던 지난날을 회상하다 말고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번뜻 정신이 돌아온 그는 귀동냥이나 해볼까 하고 말초신경을 곤두 세웠다. '광물질과 질소의 화학반응을 통한 결과물 추출에 대하여 논하라' 것이 화제의 시험문제였다.

 

  -야금을 질소액을 사용하잖아. 그건 질소가 광물질에서 순수한 금속성분을 분리해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야.

  -맞아, 그러니까 비금속 원소인 질소액을 화합물의 제조나 야금에 사용하는 거겠지.

  -그래서 문제의 답으로 야금에 사용되는 질소의 화학반응과 역할에 대해 초점을 맞춰 써냈어.

  -그래? 그런데 그건 너무 뻔한 얘기라고 생각해. 그래서 다르게 생각해 봤는데.

  -어떻게?

  -, 질소액 사용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 답을 써봤어. 왜냐면 질소의 화학반응시 발생하는 질소산화물은 환경에 아주 심각한 공해물질이거든.

  -그렇구나. 그렇지만 과학문명의 발전을 위해선 어쩔 없는 아냐. 금속을 추출해야 뭐든 만들 있는 아냐.

  -그렇지. 하지만 굳이 질소를 사용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을 있다는 얘기야. 어떤 물질은 극저온에서 분해하면 오히려 순수 금속성분을 확실하게 추출할 있대. 질소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공해발생에 대한 우려도 없고. 찾아보면 방법은 많을 수도 있어.

 

  그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그래, 바로 그거야! 타이어에 섞인 철과 섬유질을 추출해 내는 방법이 굳이 질소액이 아니더라도 된다고.

 

  그 그는 바로 텐트를 철수하고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4인방에게 급보를 띄워 공장으로 모이게 했다. 공장문을 닫은 일년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다시 모인 4인방은 인체에 해로운 공해물질을 발생시키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6개월만에 무공해 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하게 된다. 질소액을 사용하지 않고 극저온에서 폐타이어를 분쇄한 다음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 고무성분으로만 타이어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합성고무 보다도 오히려 탄력성과 내구성이 뛰어난 재생타이어 개발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게다가 질소산화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물론, 합리적인 분쇄공정을 거쳐 철과 섬유질을 그대로 재생할 있도록 분리하는 실적도 올렸다. 이론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끈질긴 다리품 덕에 기꺼이 투자하겠다는 독지가들도 여럿 나서게 되면서 일은 순풍에 돛을 매끄럽게 진행되어 갔다.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한지 한달만에 20억원의 매출신장세를 기록하며 판매망을 전국으로 확산시켜 갔다. 자동차 메이커 3사에도 문을 두드려 좋은 반응을 얻을 정도로 그의 사업은 전승가도를 달리며 대형 타이어 생산업체들을 긴장시키기에 이르렀다. 고난 끝에 재건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승승장구하던 달만에 공장에선 원인을 없는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남양주시에서 십여리나 떨어진 공장에서 꼭두새벽에 발생한 화재가 인근 주민에게 목격되기까지는 두시간이 지난 뒤였다. 뒤늦게 소방관들이 출동했지만 폐타이어 분해공정을 처리하는 1 공장과 완성품 창고는 이미 앙상한 뼈다귀만 드러낸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지난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지 그는 말을 하다말고 심하게 몸서리를 쳤다.

  -술이나 한잔 드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셔야겠어요.

 

  언니의 권유에 그는 술잔을 들며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잠시 동안의 공백에 끼여들었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졌나요?

  -아니,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 아니, 설사 밝혀졌다 해도 공개하기는 곤란했을테지. 왜냐면 여기엔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재벌기업들이 연루되어 있었을 테니까.

 

  내게 말한마디 제대로 걸어오지 못한 그가 어느새 슬그머니 반말을 구사했다. 그러나 전혀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우리집 식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룻밤새에…….

  -자기들도 좋은 제품을 만들어 정당하게 경쟁할 것이지, 그런 비열한 짓을 하지요?

 

  언니는 분노섞인 목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딱히 재벌기업들에 대한 항의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이 분노로 표현된 싶었다.

  -글쎄요, 아마도 대기업이 당장 재생타이어를 만들려면 기존의 생산수단을 모두 것으로 대체해야 하는데, 여기에 드는 막대한 자본투자를 감수할 엄두가 나지 않았겠죠. 게다가 이미 시장에 깔아놓은 제품들을 판매하기도 전에 저가의 재생타이어가 출고되면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모두 반품될 위기에 놓이게 되거든요. 하루아침에 제품을 바꿀 없는 그들의 사정 때문에 우리 재생타이어의 출고를 물리력으로라도 막으려 했던 거겠죠.

 

  -재생타이어 보다 가격으로 세일을 하면 되잖아요?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타이어들은 생산비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파는 건데 재벌기업들이 그렇게 손해를 보려고 하겠어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언니와 나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사람의 대화는 밤늦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화재로 공장의 절반을 잃어버렸지만, 십시일반이라고 이번엔 직원들 모두가 힘을 모아 잿더미로 변한 공장을 다시 짓고, 생산시스템을 하나씩 새롭게 갖춰 나갔다. 그리고 직원의 의지를 담아 생산라인을 없이 가동한 한달만에 화재 이전의 수준으로 매출을 끌어올리게 되었다. 때가 가장 어려웠지만 그래도 가장 의욕이 넘쳤었고, 하루하루 보람된 기억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렇지만 역시 한국의 경제상황에서 중소기업이란 존재는 한계가 있었다. 신제품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특허라는 제도가 제대로 소유권을 지켜주기엔 아직 인식이 부족한 상태였다. 중소기업이 피땀 흘려가며 만든 신개발품도 거대한 자본이 모방을 하고 나서면 자연히 작은 기업은 잠식되기 마련이었다. 지속적인 제품생산과 유통망을 구축하는데 드는 자금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신개발 재생타이어가 다시 시장에 나오자 이제는 하나둘씩 생산체계를 갖추게 대형 타이어 생산업체들이 너도나도 손을 대는 통에 어느새 그의 재생타이어는 소비시장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되었고, 자동차 메이커 3사와의 타이어 하청계약이 파기되면서 공장시설과 시스템 개발, 그리고 원자재 값으로 지불한 어음으로부터 꼬리를 물고 부도를 일으켰다.

공장이 지경이 되고 이후 사채업자들의 빚독촉이 점점 거세졌고, 믿기지 않지만 부채액수가 가장 적은 사채업자의 신고로 본격적인 연쇄부도가 시작되어 결국 그는 부정수표방지법으로 경찰의 추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때까지 출국금지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고, 직원들의 성화로 미국행을 결정하게 . 무너져가는 공장을 살려보겠다고 그토록 발버둥치던 직원들과 함께하지 못한 자책감만 가슴에 끌어안고 등을 떠밀리다시피 해서 떠나온 머나먼 . 뭔가 새로 시작해보겠다는 의지에서라기 보다는 그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어쩔 없이 튕겨져나와 미아가 되어버린 사내. 산다는 뭔지 LA 도착후 먹고 살겠다고 나선 데가 타이어 전문 자동차 수리점이었다. 폐타이어를 때마다 그는 지난날의 역경이 되살아난다고 덧붙였다.

 

  -타이어는 저하고 억세게도 인연이 깊어요.

  -질리지도 않으세요.

  -아니, 생각 같아서는 다시 일어서고 싶어요. 그것도 타이어로. 아마도 대기업과 부딪힐 미리 예상하고 오히려 역으로 그들과 합자를 하거나 하청받는 형태, 또는 생산수단만을 제작하는 업체로 출발했으면 오늘과 같은 결과를 빚지 않았을 지도 모르죠. 때의 실패는 욕심이 지나쳤던 데에도 원인이 있어요.

 

  객관성과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그의 평가였다. 한번 그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싹트게 하는 부분이 아닐 없다. 언니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이상 어떤 질문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의 마음은 그에게로 빠르게 이끌려 가고 있었다.

 

  그날 잠결에 문득 거실로 향하는 언니의 조용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잠든 그의 모습을 존경심어린 표정으로 지긋이 바라보던 언니. 철저하게 몰락했지만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던 그의 눈빛엔 희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6개월 우리 세사람은 침실과 화장실이 개인 좀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물론 그와 언니의 신방이 새로 꾸며졌고, 내게도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사람은 서류상의 가짜 부부가 아닌 사실상의 부부로서 새출발을 했다. 사업이 몰락한 그에게서 떠났다는 한국의 부인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디쯤에 있는지 아무런 확인도 없이 언니는 새로운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저 그에 대한 막연한 믿음만으로.

 

  재기를 위해 나선 LA에서의 막일은 생각만큼 수월치가 않았다. 아니 돈벌이가 시원찮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에겐 자유의 나라, 능력 위주의 나라로만 알았던 미국에서 한국인들의 퇴색된 기업정신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미국사회와 판이하게 다른 한인업주들의 행태에 실망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한인업체가 인건비를 위해 히스패닉들을 일꾼으로 고용해 마치 노예처럼 부려먹듯이 그도 이들과 다를 없는 취급을 받았다.

 

  이런 생활에 이질감만 쌓여가는 차에 그는 언니의 제의로 LA에서의 짧았던 피고용인의 생활을 마감하고 언니와 함께 힘을 모아 한식당을 차렸다. 옷가게를 처분하고 그동안 모았던 돈을 얹어 적당한 규모의 한식당 자리를 얻었다. 이와함께 7개월 만에 그의 영주권이 나왔고 이제는 합법적인 신분으로 미국생활을 영위할 있게 되었다. 언니와 그가 함께 손을 맞잡고 기뻐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좋은 일만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인지 언니를 불행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사건들이 그때부터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영주권이 나온 며칠이 안된 어느 그가 가게의 세금문제로 세무사 사무실을 다녀오느라 오후 3시쯤 식당에 나간 날이었다. 이미 점심식사 손님들을 치르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뒤라 식당은 한산했다. 언니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미용실에 가고 없었다. 그는 식당으로 돌아와 더위에 흘린 땀을 식히느라 한쪽 구석자리에 털버덕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주방쪽에서 주방장과 보조 아주머니들이 쉬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들은 언니 부부에 대한 얘기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얘기가 흘러들어 갔는지 그들은 이미 알만큼은 알고 있었다.

 

  -두사람이 위장결혼을 했다지 아마?

  -맞제, 그앖다가 증이 들어 살게 됐다 안카나.

  -남자가 이제사 영주권을 받았다잖아.

  -그르믄 그렇제, 나이도 사장이 아니나. 겉보기엔 훨씬 많아 보이제.

  -긍께 남자가 여자헌티 빌붙어 사는거구먼. 남자가 그리서는 안되는디…….

  -쉬잇, 조용히 . LA 여자덕에 사는 남정네가 어디 한둘이여?

 

  그는 이상 들을 수가 없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들의 얘기가 귓가를 맴돌아 정신이 아찔해옴을 느꼈다.

 

  그날 그는 식당에서 사라진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의 소식을 전혀 수가 없었다. 언니도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했지만 달리 그를 찾아나설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사흘 , 늦은 시간에 나타난 그는 술에 만취되어 있었다. 현관문에 인기척을 느끼고 언니가 문을 열었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그의 쳐진 어깨너머로 어두컴컴한 밤하늘에 떨어지는 혜성의 그림자가 얼핏 스쳐갔다.

 

  -어떻게 일이예요? 저녁식사는?

  말없이 사라진 사흘만에 술에 만취해 돌아온 그에게 언니가 던진 첫마디는 본때없이 겨우 끼니문제였다. 그리고 언니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런 언니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수가 없었다. 언니를 불행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시작되는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언니는 지금보다도 훨씬 불행해진다 해도 그에게 끼니는 거르지 않았는지 물어보겠지? 조선시대 여인인가, 지금이 밥을 못먹고 사는 시댄가? 밥을 먹고 안먹고가 뭐가 그리 대수라고.

 

  그 날부터 며칠동안 그는 식당은 물론이고 바깥에 나갈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그저 집안에서만 빙빙 돌았다. 이렇다할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눈동자를 굴리며 집안 여기저기로 왔다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며칠 언니의 제의로 라스베거스 여행을 떠났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언니에게 반강제로 끌려가다시피했다. 식구끼리 단합대회를 하자는 언니의 얘기.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니를 위해 이번 번만 따르기로 하고 나섰다.

 

  휘황찬란한 라스베거스의 밤거리는 사람을 무아지경에 빠지도록 흥분시키는 묘약을 가지고 있다. 분위기에 취하고 인파에 휩쓸리며 카지노에서 흘러나오는 야릇한 기계음에 매료되는 도시. 말로만 듣던 유명한 호텔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세계적인 권투시합이 자주 열리는 MGM 호텔에 들러 우선 침실부터 예약했다. 평일이라 방은 쉽게 구할 있었다. 라스베거스에 올때마다 카지노에서 모든 시간을 보낸 그동안의 경험으로 언니는 내가 방을 따로 얻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서 하나만 얻고 그냥 샤워나 하는 걸로 본전을 뽑자는 의견도 곁들였다.

 

  한 사람당 삼백불을 나눠주며 '굿?' 외치는 언니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지 굳은 표정으로 카지노쪽으로 무겁게 발을 옮겼다. 언니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선지 쉼없이 그를 향해 수많은 언어들을 나열했다. 손발도 바쁘게 따라 움직였다. 언니와 그의 어울리지 않는 표정연기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의자에 반쯤 비스듬히 걸터앉아 슬롯머신을 당길 때의 그의 손동작 역시 마지못해 하는듯 기운이 없었다. 다정하게도 옆에 서서 응원을 하는 언니의 몸놀림은 가엾다 못해 바보스럽기까지 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위해 언니는 그렇게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더 이상은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횡하니 자리를 떠났다. 참을 없을 만큼 화가 나는데도 눈물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 호텔방으로 올라오는 동안 내내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두어시간 잤을까. 현관쪽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잠을 깨웠다. 그와 언니가 호텔 복도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누구에겐가 목표물도 없는 허공에 소리를 질러댔고 언니는 온몸으로 그를 막아서며 현관 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 사람들하고 실갱이를 벌이면 어떡해요?

  -아니 자식이 사람 신경을 거슬리잖아! 보고 실실 웃질 않나, 기분나쁘게!

  -그렇다고 멱살을 잡아요?

  -나쁜 놈들 같으니라구. 내가 다시 여기오면 새끼 아들이다. 지가 흰둥이면 다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기세도 당당하게 현관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흥분하면 육두문자가 마구 쏟아져 나오는가 보다. 그렇게 십여분쯤을 혼자 떠들다 지쳤는지, 다시 현관문을 열고 뛰어 나가 카지노의 그들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일 같던 기세도 점차 꺾이고 침대에 꼬꾸라진 그는 어느새 코를 골며 잠에 취했다. 속의 소화기관들도 함께 잠들었는지 그의 몸에선 고약한 술냄새가 풍겼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한참동안 슬롯머신과 씨름하던 그는 그것만으로는 이상 성에 차지 않았는지 블랙 테이블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의 뒤를 바싹 따라다니던 언니는 그에게 자리를 권유했고 판에 끼여든 그는 처음엔 백불을 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카드가 생각대로 들어오지 않고 슬슬 돈이 나가기 시작하자 그는 딜러의 얼굴에 깃든 미소조차도 눈에 거슬렸다. 그리고 영어를 못하는 그는 딜러가 판을 돌릴 때마다 무어라고 그에게 한마디씩 건네며 웃자 자기를 비웃는 것으로 알고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까지 정신없이 마셔댄 술기운이 조금씩 살갗으로 발산되더니 이윽고 머리끝까지 올라와 그의 구겨진 자존심에 도리질을 해댔다. 순간 그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딜러의 멱살을 잡아채는 '거사' 일으켰다. 다행히도 가까이에서 지키고 섰던 경비원의 제지로 소요사태는 몇초만에 진압이 되었고 그는 언니와 함께 카지노에서 추방명령을 받았다. 식당을 임시휴업하면서까지 어렵게 이틀씩이나 확보해낸 오랜만의 휴가가 그렇게 망쳐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더니. 난리통을 애써 잊으려고 뒤척이다 겨우 잠이들었다 싶었는데 새벽 네시쯤 되었을까, 언니의 가냘픈 신음소리가 들려 잠을 깼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기에는 너무 무안한 광경이 사람의 침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없는 뜨거운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잠이 눈치챌까봐 숨을 죽이고 자는 해야만 했다. 주책맞은 두사람이 내게 들키면 오죽 무안해 하겠냐는 생각 때문에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귀만 살아서 저절로 그들의 침대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그나마도 두사람은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의식했는지 옷을 입은 더위도 아랑곳 없이 이불로 허리 아랫부분을 가리고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저쪽 벽을 향해 나란히 누운 자세로 소리를 죽여가며 천천히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언니는 터져나오려는 신음소리를 죽이려고 퍽이나 애쓰고 있었다.

 

  아예 방을 따로 얻든지 아니면 낮에 가버릴 , 후회도 해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렇다고 그냥 일어날 수도 없고. 이렇게 곤란한 지경이 어디에 있을까. 절제를 못하는 속물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한편으론 부부가 저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우면 풀어지고. 그리고 다음날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며 아침 밥상을 마주하고. 그러니까 부부문제는 제삼자가 개입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겠지. 언니와 싸운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의 기분이 내내 좋지 않았는데, 차라리 일인지도 모른다고 억지로라도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도 잠은 이상 같지 않았다.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데, 세상에 그런 고문이 어디에 있을까.

 

  라스베거스 여행은 두사람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아니, 라스베거스라기 보다는 그날 그들의 정사가 해묵은 갈등을 한꺼번에 해갈시켜주었다. 그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언니도 그제서야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때까지도 언니와 나는 갑작스런 그의 가출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굳이 이상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뭔가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을 거라는 짐작만 했을 . 라스베거스 여행은 그래서 성공적이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그는 라스베거스 여행 뒤로 거의 일주일에 꼴로 가까운 카지노를 찾았고, 날이 갈수록 횟수도 늘어나기만 했다.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도박에 빠지기 쉽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질 못한다더니 말이 사실인가보다. 최근 그는 거의 하루가 멀다하고 카지노에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나가면 아예 이틀이나 사흘 뒤에 집에 돌아오곤 정도로 그는 도박꾼이 되어버렸다. 언니에게서 반강제로 빼앗아가는 돈의 액수도 갈수록 커져만 갔다. 언니도 처음엔 카지노라도 취미삼아 다니는 그를 기꺼이 후원하겠다는 뜻을 비췄었다. 그러나 언니는 그의 도박이 취미를 넘어서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되어가자 만류해보기도 했지만 말린다고 들어먹을 리가 없었다. 언니가 아무리 돈이 없다고 못밖아도 그는 곧이 들으려 하지 않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뜯어가고야 말았다. 요즘엔 잊을만하면 한번씩 찾아와 언니에게서 돈을 갈취해가려고 소란을 일으켰다. 이젠 정말 그는 있으나마나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아니 있어선 안되는 인물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는 가져간 돈을 빼앗기고 마치 패잔병 같은 몰골로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매번 똑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이제 다시는 가지 않을거라는 . 이러다간 인생 망치겠다는 . 이젠 손씻고 착실하게 살겠다는 . 그리고 돌리고 뒤에 역시 빼놓지 않는 말이 있다.

 

  "거의 본전을 찾았었는데, 그만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그리고 며칠 다시 언니에게 밑천을 요구하며 역시 매번 같은 대사를 읊조렸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 본전의 반만이라도 찾으면 손을 떼겠다는 . 그리고 어젯밤 꿈이 너무 좋아서 가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까지.

 

  그가 도박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언니는 밑천을 대주느라 돈이 거의 남아나질 않았다. 조그만 식당에서 그렇게도 돈이 많이 벌리는가 싶을 정도로 언니의 주머니에선 그에게 대주는 밑천이 한없이 나왔지만 아무래도 밑빠진 독에 붓기였다. 그런 상황을 무려 동안 끌어왔다. 어지간히 오래도 버텨왔다. 그동안에 우리는 렌트비가 아주 지금의 시민아파트로 옮겨야 했고, 종국에 가서는 식당마저도 처분하고 언니는 다시 술집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의 도박성이 끝가는 모르고 심각해지면서 언니의 마음도 점점 병들어갔다. 언니는 날이갈수록 즐거움과 희망을 잃어버린 시한부 환자 같이 몸과 마음이 썩어들어 갔다. 이따금씩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해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리고 어제 그가 집안의 살림살이에다 온갖 화풀이를 하고 뒤로 언니는 결코 회복될 없는 선을 넘어서 버렸다. 말을 잃어버렸다. 갑작스런 충격 때문이었다. 밤새 언니의 말을 찾아주기 위해 애를 써봤지만 말을 안하는 아니라 잊어버린 것이었다. 다름아닌 실어증.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올림픽가를 질주하던 택시가 갑자기 귀를 찢어놓을 듯한 금속성을 길게 울리며 오륙미터쯤 미끄러지다 기우뚱 멈춰섰다. 기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 시잇트! 아침부터 재수없게…"

 

  대로변에 사람들이 던져놓은 과자부스러기를 주워 먹겠다고 덤벼들던 비둘기 떼를 발견한 기사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마리가 뒷바퀴에 걸려 압사된 모양이다. 복잡하지도 않은, 한줌밖에 안되는 조류의 내장이지만 붉은 피와함께 얄팍한 외피를 뚫고 터져나와 아스팔트를 더럽힌 형상은 속을 메스껍게 했다.

 

  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재빠르게 언니의 눈을 가렸다. 이미 조금 늦긴 했지만. 멀쩡한 사람이 봐도 끔찍한 장면인데, 하물며 언니는 지금 정상이 아닌데…….

 

  언니의 눈에선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언니의 눈물 앞에서 나는 아무런 감정을 내색할 수가 없었다. 미물이지만 생명체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오죽 놀랐을까. 하지만 언니의 눈물이 다른 의미를 가진 아닐까. 자신의 처지를 방금 횡사한 비둘기와 비교하는 아니겠지. 혹시 다른 마음을 먹는 아니겠지?

 

  비둘기는 아무 소리도 없이 나자빠졌다. 비둘기는 본래 여느 새처럼 가냘픈 울음소리를 내지 못하는 조류이기 때문에 아무 소리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아니면 기를 쓰고 발악해봤지만 브레이크 소리에 묻혀버린 것일까. 차창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비둘기는 날개짓 없이, 파르르한 떨림조차 없이 화를 면하기 위해 창공으로 날아오르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쳤는지 한쪽 날갯죽지만 하늘을 가리킨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삶과 죽음이 몇초 간격으로 갈라지는 순간이다. 언니는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생각에 빠져있는 계속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한 순간 언니는 마침내 혼절하고 말았다.

 

  이틀동안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않던 언니가 사흘째 되는날 아침에 잠깐 눈을 떴다가 이내 다시 잠들었다. 2 동안의 고통을 부족했던 잠으로 씻어내려는지 언니는 잠에서 헤어날 몰랐다. 병원에서도 일단은 편하게 누워있도록 하는게 좋다는 의견이었다. 갑작스런 충격으로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며, 신체가 건강하니까 회복될 거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리고 당분간은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병실에 누워 곤히 잠든 언니의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 옷가지를 챙기러 아파트로 갔다. 이것 저것 입을 만한 옷가지를 챙기다가 언니의 속옷을 넣어둔 서랍장 바닥에서 포장지로 곱게 통장 하나를 발견했다. 통장에는 5년동안 하루도 어김없이 매달 1일날 입금란에 $ 500이란 아라비아 숫자가 언니의 글씨로 또박또박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앞장에는 이렇게 있었다.

 

  '김지은 결혼자금 / 만약 장학금을 받으면 학비'

 

  언니는 그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나를 위해 사용할 결혼자금과 학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그토록 심한 횡포를 당할 때에도 언니는 이것 만큼은 끝끝내 내주지 않고 버텨왔던 것이다. 천근만근의 고통을 작은 몸으로 홀로 이겨내려고 했으니……. 눈에 맺힌 눈물방울이 시야를 가려 이상 들여다 수가 없었다.

 

  그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인간이 끝내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먼저 경찰국이라고 말한 상대방은 인간의 인적사항을 말한 가족이 맞느냐고 물었다. 이어 그는 인간이 총격을 당해 사망했으며, 원인은 카지노에서 십만불을 챙겨가지고 차를 타는 순간 강도를 만났고 돈을 움켜쥐고 저항하다 끝내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족이 맞는다면 와서 확인을 뒤에 시신을 수습해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이내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이미 끊어져 버린 수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용히 제자리에 내려놓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향해 서서히 차를 몰았다. - by KJ 1999.2.6

 

 

단편소설 목록으로 이동하기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바랜 이력서 - 단편소설 -  (0) 2023.01.17
이방인 - 단편소설 -  (0) 2023.01.10
국경의 총성 - 단편소설 -  (0) 2023.01.05
매니저 - 단편소설 -  (0) 2023.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