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WRITERJANG

소박한 글쓰기

단편

빛바랜 이력서 - 단편소설 -

writerjang 2023. 1. 17. 08:19

후줄근하게 젖은 작업복 밑동을 쥐고 툴툴 털어냈다. 언뜻 보기엔 앞가슴에 들러붙은 먼지구뎅이를 털어내려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정호의 의도는 있었다. 두어 시간째 나르고 있는 컨테이너 분량의 박스를 퇴근 전까지 모조리 창고에 쟁여넣느라 온몸이 후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중국산 여행용 가방이 빼곡히 담긴 박스였다. 전에 선적돼 머나먼 뱃길을 달려온 컨테이너가 산페드로 부두에서 다른 회사 수입품에 엮여 쿼터 초과 시비로 싸잡아 걸려드는 바람에 무려 동안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오늘 간신히 빼내오긴 했는데 오후 네시쯤에야 겨우 풀려 이제사 창고까지 배달됐다고 한다. 물론 사장의 엄살섞인 넋두리를 귀동냥해서 알게된 정보였다. 사장은 부득이 퇴근시간이 늦어지더라도 몽땅 창고 깊숙이 쟁여넣어야 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웬놈의 더위는 계절 가는줄도 모르고 치대는지 시월 중순에 바짝 접어드는데도 물러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창고는 좁아터진데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이라곤 죄다 안으로 각목때기를 덧대고 못질을 해놓아 환기는 고작 정문셔터와 트럭 출입구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평상시엔 그나마 견딜만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레 물건이 밀려들어올 더위를 다스리기 버겁다. 그나마 저쪽 구석빼기에 우뚝 세워둔 대형 선풍기는 그대로 전시용일 뿐이다. 선풍기를 켜놓기만 하면 언제 나타났는지 사장이 코드채 뽑아놓곤해, 꼽네 뽑네 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일꾼들이 지쳐 나자빠져야 만족스런 승자의 미소를 띄우며 사무실로 물러나는 사장이다.
선풍기 쟁탈전이라면 정호는 아예 포기한 축에 속한다. 벌써 건으로 사장과 여러번 부딪혀 참패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터다. 사장의 일침은 참으로 기막혔다.
-
애껴야 살거 아임메. 너거덜은 살고 싶지 않드나? 간나시키덜!
가만보면 사장의 사투리는 참으로 절묘했다. 경상돈지 함경돈지, 아님 평안돈지 도무지 구분할 없는 말투가 뒤엉켜 흘러나온다. 그런데 희안한건 어느 쪽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거다. 달째 유심히 지켜본 결과론 일꾼들을 다그치거나 화급한 일거리를 지시할 때마다 이북 사투리가 섞여들곤 했다. 평소 쓰는 사투리로 봐선 필시 경상도 어디쯤이 고향임에 틀림없다고 넘겨짚었다.
그런데 정호의 어설픈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사실은 이북 출신인데, 일사후퇴 선친께서 현명하옵신 판단을 내리시어 무려 여덟 식솔을 이끌고 부산까지 단숨에 내려왔으며, 선친의 영명함이 아니시었다면 지금쯤 우리 식구들은 아오지탄광에서 석탄이나 캐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회식 때마다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하는 사장의 집안내력이었다. 자라면서 경상도 사투리만 늘고 이북 사투리는 새까맣게 까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이십여년 이민와서 다운타운에 날품팔이라도 하려고 기웃대다 가방 도매상 사장 눈에 들어 가방과의 이십 인연을 맺게 되었고, 하늘 같이 떠받들던 사장이 바로 이북 출신이었다. 사장처럼만 살면 성공하겠다 싶어 닮아보려고 부단히 애쓴 결과 사투리까지도 저절로 닮게 되었고,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이북말씨 덕에 금방 익숙해지더란 얘기였다.
작업복 끄트머리를 팔을 아래위로 부지런히 놀려댔다. 들썩대는 작업복 사이로 밀려드는 바람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던 땀방울을 급냉시켰고, 축축한 면내의가 피부에 철썩 들러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차갑다 못해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더위를 식히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행동이 더위를 못참고 나부대는 행위라는걸 들키기는 싫어 먼지터는 시늉을 냈다. 바닥에 나뒹구는 골판지 쪼가리를 집어들고 부채질을 해도 될성 싶은데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딴엔 남들 앞에선 눈꼽만큼도 약한 태를 내기는 싫었음이라. 특히 히스패닉이 주를 이루는 창고작업은 더욱 그랬다. 일말의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었고 생존경쟁의 싸움판에서 약자로 낙인찍히는 것도 내심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네들은 똑같이 일하고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마에 방울 묻어나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육체노동을 위해 태어난 민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정도였다.
넉달 일간신문 한귀퉁이에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온 정호에게 이력서를 쭈욱 훑어본 사장이 처음 내뱉은 말은 이랬다.
-
막노동이라곤 해본 력사가 없제? 여그는 천하장사뿌인데, 샌님이 배겨낼 있을꺼나?
사장의 비아냥거림에 속이 뒤틀릴만도 했는데 뜻밖에도 그렇지 않았다. 본래의 정호라면 이런 상황에선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말고 걸어나와야 마땅했다. 당당하게. 그런데 희안하게도 속내에 똬리를 틀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자존심은 오히려 그런 사장을, 그런 비아냥을 이겨내야 한다고 열렬히 응원을 보내오고 있었다.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
-
그으래? 그라믄 두고볼기라.
막노동을 해본건 아니었다. 스무살 되던 공사판을 찾아 떠돌던 기억이 있다. 동생과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대로 해야만 했다. 그러나 공사판 경력은 잠깐 뿐. 노가다라면 형보다는 그래도 덩치가 좋은 자기가 낫다며 돈은 자기가 벌테니 형은 공부를 계속하라는 광호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다. 맏형으로서의 의무는 종지부를 찍었고 터울인 둘째 광호가 생활전선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정호는 손쉬운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계속했다.
이력서랍시고 구색을 갖춰보려 해도 안됐다. 이력서란 입사하고자 희망하는 회사와 해당 부서의 업무내용에 맞게 그쪽 방면의 경험을 꾸며 써야 하는 법인데, 없었다. 잠깐의 노동판 경험은 쓰나마나였다. 시간쯤 잔머리를 굴리다 종내 그만두기로 하고 있는대로 써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그대로 써왔다.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도 배경이면 후대하지 않을까, 하는 알량한 바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설마 홀대하지는 않으리라 기대했었다. 적어도 배운 사람한텐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한국사람들이니까.
그런데 착각이었다. 이력서 내용은 무슨무슨 대학을 나왔고 무슨무슨 출판사 편집부에서 삼년, 무슨무슨 지방일간지 교열부에서 삼년이 전부였다. 이런 막노동판에선 일말의 도움도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창고 안에서 일하고 있던 히스패닉계 일꾼 명은 그가 사장에게 이끌려 들어오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사장이 손수 나와 소개하는데도 그들의 자세는 저마다 하던 일감 옆에 삐딱빼딱, 배배 그대로를 유지한 채였다. 사장이 소리로 정호를 가리키며 이름을 소개했고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따라 외쳤다.
-
쩡꼬!
-
?
-
쪈코!
사장이 흐드러지게 웃었고 그들 모두 창고가 떠나가라 웃어댔다. 사장과 혈족인 자신이 삼의 혈족에게 모멸당하고 있다는 기분에 왈칵 울음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장은 곧바로 사람에게 그만 웃고 일하라며 손짓을 했고 그들은 이내 본래 하던 자신들의 일로 돌아갔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키는 작달막했지만 가뿐하게 박스를 들어 나르는 몸놀림하며 칸칸이 재는 솜씨는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사장이 사무실로 돌아가고 정호가 홀로 남아 멀뚱멀뚱 있자 개중 제일 어려보이는 일꾼하나가 쪈코, 하며 그를 불렀다. 불쾌한 손가락짓과 함께. 정호는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세워보려는 미적미적 걸어갔다. 어린 히스패닉은 그에게 자기 일을 거들라고 지시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어린 히스패닉은 내내 알아들을 없는 언어로 주절대며 손짓 몸짓을 해댔다. 시키는 대로 따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 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은 무조건 졸개 취급이었다.
정호는 퇴근하기 위해 길가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바지 호주머니에서 뒤적뒤적 열쇠꾸러미를 찾아 꺼내들고는 운전석 문고리에 키를 꼽으려다 말고 트렁크쪽을 넌지시 돌아봤다.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렁크 문이 열렸다. 오랫동안 치우지 않아 트렁크 속은 너저분했다. 널려있는 잡지책과 주간신문, 단행본들을 이리저리 치우더니 속에서 서류봉투 통을 찾아냈다. 봉투를 살짝 열어보았다. 기억했던 대로다. 달랑 남아 있었다.
이민 오자마자부터 자동차 트렁크에는 이력서를 넣고다녔다. 언제라도 기회만 닿으면 그럴듯한 회사에 지원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지원대상 회사는 신문사나 방송사, 그리고 출판사였다. 벌써 군데는 다녀봤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한국서 아주 뒤쳐진다는 지방 잡지사 만한 데도 찾기 어려웠다.
땅에 발을 들인지 어느덧 다섯 해를 넘기고 있었다. 어설픈 아메리칸드림을 꿈꾼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나라를 너무도 빤히 알고있었다. 정보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었다. 출판사 편집실에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 구석구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속속들이 있을 정도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왔다. 한국도 이젠 보릿고개 구비를 넘기고 선진대열에 합류했다느니, 고지가 바로 앞에 보인다느니 당당하게 외치는 시대가 도래했다. 아쉬운게 없었다. 미국이 대단해 보이던 시절은 분명 지났다. 게다가 어줍잖긴 했어도 지식인 대열에 끼여 비록 존경받는 정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무시당하지 않을 만큼의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왔다. 그래도 이민을 결심한 이유는 설마하니 조그만 땅덩어리 보다 못하랴, 하는 기대심리가 내심 스스로를 부채질한 탓이었다. 게다가 동생들도 이젠 뒷바라지가 필요없는 나이가 되었다. 광호는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생활력을 갖추고 있었고 막내도 이젠 성인이 되었다. 아니, 그건 핑계일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기억하고싶지 않은 아버지의 사건 이후 어디론가 벗어나고픈 몸부림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내딛은 낯선 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서른두 동안 쌓아왔던 학력과 경력과 기득권을 몽땅 던져버려야 판이었다.

 


이민온 이튿날 작심하고 써둔 열두 장의 이력서 이제 남은 거라곤 달랑 석장 뿐이었다. 결단코 거대한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의욕이 넘쳐나던 때는 바로 뿐이었다. 아홉 장의 이력서를 써먹는 동안 어디 군데 붙이고 눌러 앉을만한 데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버리게 되더라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강해졌고 이내 다운타운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그럭저럭 먹고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넉달 동안의 다운타운 생활 내내 갈등이 나지 않았다. 그토록 어려웠던 시절에도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망정 시를 쓰겠다는 꿈을 꺾지는 않았었다.
돈과 사이의 간격. 가지를 놓고 저울질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꿈을 좇는 생활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했었다. 살더라도 그리 문제될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돈의 무게가 점점 커져만 갔다.
, 이런 후덥지근한 날엔 넓고 푸른 동해바다에 풍덩 몸이라도 담궜으면 좋으련만.
해거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골목어귀를 돌아 보무도 당당하게 하우스 주차장 입구로 자동차를 몰아 들어갔다. 끄트머리 조그만 군부대 막사 같은 건물이 그가 살고있는 주거공간이었다. 이른바 하우스 뒤채. 애초 주차건물로 지어진 것을 집주인이 불법으로 개조해 칸으로 나누고 세를 들인 곳이다. 여기에 세들어 사는 남자가 붙여준 건물의 이름이 막사였다. 그나마 정호의 방은 다른 보다 제법 편으로 매달 사십불 웃돈을 얹어 세를 치러야 했다. 본채 뒤켠에 딸린 주방과 샤워장은 공용이었다.
내내 흘린 비지땀으로 몸은 소금에 절인 고등어자반처럼 짭짤하게 오그라들었다. 유독 땀이 많은 체질이긴 하다. 같이 일하는 히스패닉이나 한국사람들도 정호처럼 비지땀을 흘리지는 않는다. 방으로 들어서면서 화장실에 딸린 샤워장 쪽을 힐끔 바라봤지만 등이 있지 않았다. , 다행이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옷을 훌러덩 벗어제끼고 반바지에 하얀티로 단출하니 갈아입었다. 목욕수건 꺼내들고 밖으로 튕겨지듯 재빠르게 뛰어나갔다.
그러나, 였다. 어느새 샤워장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낭패였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몸이 끈적거려 정신이 아찔해지고 꼭뒤로 피가 쏠리는 느낌이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줄일 있는 데로 줄여보자는 마음에 개중 세가 곳을 골라 입주했었다. 하지만 겨우 하루를 넘기고 후회했다. 매번 이런 경우를 당할 때마다 이사를 나간다 나간다 하면서도 주저하는 이유는 이사다니는 곤욕을 너무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러구러 반년이 흘렀다.
"
아고, 미안합니다, 헤헤. 하두 급해서."
샤워장 앞에서 서성대는데 문이 삐걱 열리더니 옆방 엄씨가 쭈뼛쭈뼛 걸어나왔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긁적대며 게면쩍게 고개를 조아리는 엄씨의 웃는 얼굴에 낯을 붉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색하게 맞받아 웃었다. 나이 마흔다섯에 어울리게도 머리칼이 드문드문했다.
"
말씀을. 보셨어요?"
"
, 네네."
사실 따지고보면 엄씨가 미안해야 일은 아니었다. 애시당초 이런 환경에서 살겠다고 들어온 사람이 잘못이고, 없는 죄라면 죄일뿐. 그런데 엄씨는 딱히 화장실을 새치기했기 때문에 미안해 하는건 아니었다. 엄씨의 표정과 행동은 그랬다. 어쩌다 오가며 마주치기라도 하면 헤헤, 웃음을 흘리며 손을 올려 머리를 긁적긁적댔다. 아마도 사람이 좋아서 그럴 것이다. 누구라도 그런 씨를 보면 없이도 사람이라고 칭송을 입에 담는건 무리가 아닐 성싶다.
처음 집으로 이사 들어온 마당 켠에서 엄씨와 마주쳤다. 생면부지의 만남이었지만 엄씨는 대번에 고개를 조아리고는 특유의 뒷머리 긁기를 시작했다.
-
아고, 안녕하십니까?
-
네에, 안녕하세요?
-
저기, 오늘 이사 오시는군요. 누추합니다만 오셨어요, 헤헤.
말투가 마치 주인행세를 하는 했다. 짧은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엄씨는 많은 말을 했다. 여기는 말이죠, 생긴건 이래봬도 조용하죠, 마켓도 가깝죠, 밤엔 새소리까지 들리죠, 사람 살기엔 이만한 없어요. 번잡스러웠다. 정호는 그런 엄씨를 오해했었다. 먼저 이사왔다고 텃세라도 부리려는 기세로 보여 앞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주인 여럿 뫼시고 살아야할 팔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오해는 봄눈 녹듯 잦아들었다.
하지만 정작 엄씨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싫었다. 바보스러운 웃음 뒤에 가려진 무능력이 답답하고, 한심스럽고, 심지어는 격멸스럽기까지 했다. 어디 나가서 바보짓이나 하고 다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씨와 마주칠 때마다 들곤했다. 묘하게도 엄씨와 마주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생각났다. 다만 엄씨의 웃음소리 '헤헤' 아버지의 그것은 조금 달랐다. 아버지의 것은 '허허'였다.

 

이태 동안 둔천골 골짜기엔 산자락 구비마다 따사로운 봄볕을 무시하듯 녹지 않은 잔설이 듬성듬성 수를 놓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곤했는데 요상스럽게도 동안 진달래가 씻은듯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이상기온 탓이려니 생각하고 일이지만 벌써 아홉 해째 이맘때쯤 산에 오르는 정호에겐 상서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아홉 해째라. 자식들에겐 한참 중요할 , 이제 고등학교를 들어갑네, 대학입시를 앞에 두었네 속세를 등지고 불가에 귀의한 아버지였다. 그런 작심을 하기까지 숯덩이가 되어버린 아버지의 속내야 모를 없었지만 이해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분명 달랐다. 사업이랍시고 벌이는 일마다 매번 사기를 당하거나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끝내 꼬꾸라지는 쓰라린 경험을 거듭하던 아버지에게 결정타를 날린 바로 둘도 없는 불알친구의 사기행각이었다. 세상에 피를 나눈 형제 하나 없는 아버지는 그래도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는 고향 친구 두었음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데 놈의 불알친구란 작자가 동업으로 정수기 사업을 벌여놓고 대리점 분양 명목으로 거둬들인 계약금 이십억 원을 몽땅 가로채 달아나는 바람에 아버지가 모조리 뒤집어쓰게 되었다.

 


아버지는 미욱한 구석 투성이었다. 당하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했다. 사람을 너무 믿는게 탈이었다. 때마다 아버지의 허탈한 웃음소리는 허허, 였다. 정호의 인생관은 바로 결정된거나 다름없었다. 결코 아버지처럼만 되지 말자. 누구든 믿지 말고 바보처럼만 살지말자고 결심했다.
그래, 죽음에 이르는 보다 차라리 속세를 등지는게 그래도 낫겠다 싶어 아버지의 귀의가 달갑지는 않았지만 이해는 했었다. 사건이 터진 대리점 신청자들의 계약금 반환독촉은 끊이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집앞에는 그들의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는 술로 지새는 날이 많았고 술기운이 떨어지면 시름시름 앓아눕기 일쑤였다. 언제나 포근하게만 다가오던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눈길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식구들은 빛쟁이들한테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다. 그러던 어느 아버지는 갑자기 잠적을 감췄고 빛쟁이들도 덩달아 뜸해졌다. 공백이 생겼다. 혼란 뒤에 찾아온 공백, 심상치가 않았다. 흐트러진 수면제 더미 위에 쓰러져있는 어머니를 발견한 바로 때였다.
어머니를 잃은 일년만에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다. 그곳이 바로 둔천골이었고,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약수암이 바로 아버지가 머무는 암자였다. 한사코 찾아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호는 아버지와의 이승에서의 연을 이렇게나마 붙잡아보려는 심정으로 매년 봄이면 산에 오른다. 북풍한설이 지나가면 불현듯 생각나는 아버지였다. 그게 벌써 올해로 아홉 해째가 되었고 그의 나이 서른에 색시감을 아버지에게 인사시킬 요량으로 영주와 함께 등정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산길을 헤집고 올라가도 진달래는 보이지 않았다. 구비 돌아 등성마루 너머에 어렴풋 약수암이 보이는 산중턱까지 올라왔는데도 진달래는 역시 없었다. 허탈했다. 팔을 벌리고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싯누런 산잔디 위에 가뭇해진 눈덩이가 살짝 엉겨붙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작년에도 그랬었다. 진달래가 눈에 띄지 않았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단숨에 팔부능선을 뛰다시피 올라갔었다. 아버지는 불당에 들어 불공에 심취해 있었다. 안도의 숨을 몰아쉬고는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았는데 스웨터 속이 축축하게 젖은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입으로는 단내가 뒤섞인 매캐한 입김을 쉴새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스웨터를 툭툭 털어내며 이미 오랜 안면이 있는 공양보살에게 살갑게 인사를 던지고는 불쏘시게로 부엌 아궁이를 부질없이 헤집어대던 기억이 있다.
허겁지겁 따라와서는 잔숨을 고르며 따갑게 쏘아대는 영주의 눈초리가 밉지 않았다. 진달래를 찾느라고 함께 산을 오르던 영주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있었다. 그녀에겐 삼년 동안의 만남 내내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선 일언반구 들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아버지의 존재를, 그리고 저간의 사정을 용케 알아내고는 올해엔 따라나서겠다고, 먼저 인사를 드리는게 순서 아니겠냐고 무턱대고 우기는 바람에 마지못해 그녀와 동행하게 되었다.
-
그렇게 정신없이 올라가는거야? 어디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아님, 숨겨논 애인?
다짜고짜 따져드는 영주에게 팔을 뻗어 옆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등등했던 기세와는 달리 그녀는 고분고분했다.
-
정말 괜찮겠어?
-
……? 말야?
그녀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커보였다.
-
아버지가 대처승이라도 괜찮겠냐구. 중이라도…….
-
오빠!
-
그래,  얘긴 이제 그만하자.
얘기는 이미 산에 오르기 전에 끝났었다. 영주도 아는 사실이었고 이상 숨길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부끄러울 일도 거리낄 얘기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해줘야만 같은 얘기는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만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의 비참한 끝을 얘기해줘야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빼닮은 자신을. 내가 오빠하고 살지 아빠하고 살아? 그녀의 마디에 힘겨우리라 짐작했던 논쟁은 단박에 종결됐었다. 그런데도 가슴 언저리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들어앉은듯 버거웠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머릿속이 온통 뒤엉켜버린다.
따뜻한 기운과 기운을 동시에 싣고 건들건들 불어오는 사월 초순의 산바람이 오묘하다. 이른 호랑나비 마리가 하늘가를 맴맴 휘돌더니 어느 지점에선가 먹이를 발견하고는 저공비행으로 급격히 낙하한다. 꽃봉오리를 피워낸 이름모를 들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미처 영글지 못한 가냘픈 들꽃은 호랑나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르르 몸을 떤다. 날개를 한껏 들어올린 호랑나비의 꼬랑지에서 길쭈름한 것이 슬그머니 나오더니 꽃봉오리 안으로 쑤욱 빨려들어간다. 불그스레 달아오른 어린 들꽃은 심하게 몸을 떨어댄다. 호랑나비의 날개짓이 더욱 거세졌다. 그리곤 이내 그쳤다. 어디선가 풍요를 구가하는 농부들의 메나리가 구성지게 들려온다. 마침내 호랑나비는 길쭈름한 꼬랑지를 뽑아 하늘 높이 날아간다. 꼬랑지에 묻은 수액이 길게 늘어져 실오라기가 되어 푸른 하늘에 흩날린다. , 그것은 연분홍 핏빛이었다. 대학을 마치고 이제 사회인이 영주가 성숙한 여인으로 다가왔다.
산에서 내려온 다음 암자에서 연락이 왔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불당 안을 에두른 일만 개의 초가 경쟁하듯 불을 밝혀내고 있었다. 태우는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약수암을 거느리는 큰절의 주지가 홀로 앉아 목탁을 두드리는 모양새가 초라해 보였다. 출가한지 십년만에 아버지는 세상을 등졌다. 심근경색증. 십년 동안의 고통이 한꺼번에 엄습했으리라.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늦게야 동생들이 부랴부랴 달려왔고, 영주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
아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쿨럭."
"
……,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막사 앞에서 맛갈나게 피워문 담배맛에 흠뻑 젖어 정신을 놓고 있었다.
"
담배 개비만 빌립시다, 쿨럭"
당당했다. 그리고 씩씩했다. 엄씨는 담배 얻어 피울 만큼은 그렇게 군인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엄씨의 헤헤가 오늘은 쿨럭으로 바뀌었다. 내내 밭은기침을 심하게 해댔다. 기침을 때마다 고통을 못이겨 가슴을 움켜쥐었다. 얼굴에 피가 몰려 불그죽죽했다. 지난밤, 밤새도록 막사를 어지럽힌 밭은기침의 주인공을 찾았다.
"
요즘 안나가세요?"
빤히 아는 얘기를 정호가 인사치레로 물었다.
"
쿨럭, 요즘 일거리가 없어요. 경기가 시원찮아서 노가다판은 재미없습니다, 쿨럭."
"
그렇더라구요."
엄씨는 페인트 일을 하고 있었다. 불경기 탓에 일감도 줄어든데다 삼일치 일당도 못받고 짤렸다고 하소연하는 엄씨의 얼굴에서 딱히 불만스런 구석은 찾을 없었다. 자신의 무능력을 불경기란 단어 뒤에 교묘하게 숨기려는 노력이 가상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장은 참으로 대단한 거야 어려운 때에 끄떡도 않고, 라며 정호는 재빠르게 회사생각을 떠올렸다. 회사가 자랑스럽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만한 회사도 없었다. 인종차별 두지 않고 모두가 동일한 보수로 시작하고, 봉급을 밀리는 일도 전혀 없으니.
"
아참, 형씨도 노가다판이죠? 쿨럭."
"
? , 네에……."
"
요즘 재밌는 없습니까?"
"
글쎄요, 이런 불경기에 다들 힘들다고 하는데, 일인들 되겠어요?"
"
헤헤……."
다시 엄씨의 입에서 헤헤가 나왔다. 안심이다. 그래도 쿨럭 보다는 헤헤가 낫다. 이래도 헤헤, 저래도 헤헤. 역시 엄씨는 헤헤 밖에 몰랐다. 싫다는건지 좋다는건지, 인정한다는건지 불만이라는건지, 즐겁다는건지 슬프다는건지 도시 구분이 없었다.
사실 엄씨의 웃음엔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만 했다. 지난번 주인 할머니에게서 얼핏 들은 얘기론 엄씨의 사연은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배운 없이 몸으로 버텨온 힘겨운 지난 날들, 결국 처자식한테 버림받기까지 감수해야만 했던 고통과 상처. 내용을 알고나니 엄씨의 얼굴에 깃든 웃음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끝방에 세든 오십대 사내 옥씨가 하우스 정문 쪽으로 불쑥 들어왔다.
차림새가 추레했다.
"
아고, 이제 오세요?"
"
. 미스터 , 지냈나?"
"
헤헤, 그럼요. 재미 좋으신가봅니다? 쿨럭."
"
아니, 전혀."
"
그런데 어째 이렇게 안봬십니까, 그래?"
"
어디 다녀왔어. 먼데."
옥씨는 두어달 사람 가장 늦게 입주했다. 정호는 옥씨와는 데면데면 했다.
"
안녕하세요?"
"
, 그래. 미스터……."
"
손입니다. 손정호."
"
그렇지, 미스터 . 직장은 댕기고?"
"
."
그게 전부였다. 옥씨와는 의례적인 인사만 오갈 뿐이었다.
"
미스터 , 저녁은?"
"
아고, 아직입니다. 쿨럭"
"
요즘도 그래? 맨날 라면으로 때우는거 아냐?"
"
헤헤……."
"
어째 빼싹 마른게 못먹었나봐? 기침도 심하고."
"
헤헤, 사실은 요즘 먹는게 소원입니다. 어쩌다 먹는게 소원이 돼버렸는지, 쿨럭."
"
가자구. 오늘은 내가 쏜다. 배때기에 기름칠 하자구."
"
헤헤."
쭐레쭐레 따라나서는 엄씨의 엉덩짝이 유난히 작아보였다. 엄씨는 발짝 떼더니 문득 맘에 걸렸는지 뒤를 힐끔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
같이 가시죠."
"
그래, 식전이면 같이 가자구."
그제서야 옥씨도 마지못해 외교적인 발언으로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런데 거기에 단서는 붙이냔 말이지. 식전이면 가자는건 먹었으면 따라오지 말라는 얘기 아니던가. 역시 스타일이 아니라며 정호는 속엣말로 괴씸죄를 적용했다. 고기 못먹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외교적인 언사엔 외교로 맞선다.
"
아니, 저는 됐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그제서야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던지 사람은 총총 사라졌다.
분명 옥씨의 이번 외유도 지난 번과 동일한 일이었으리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람을 상품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몸을 파는 여자가 그러했고 파는 여자를 사고파는 놈들이 더욱 그러했다. 모르긴 몰라도 엄씨는 파는 여자를 파는 일을 하는듯 했다. 지난번 주말, 서너 명의 남녀가 찾아와서는 어떻게 당신은 매번 그런 못난이들만 데려오느냐, 손님들한테 맨날 퇴짜만 맞고 돌아와서 죽을 맛이다, 이렇게 가다간 본전도 못뽑고 망하겠다, 이번에는 반드시 미스코리아 아니면 안된다는 얘기들이 방문 너머로 너저분하게 넘쳐났었다. 돈벌이 없다고 매양 백수놀음이나 하는 옆방 엄씨도 문제였지만, 인륜이고 뭐고 팽개치고 한밑천 두둑히 챙기려는 인신매매범 옥씨는 더욱 정호의 눈엔 곱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와서 제자리 달리기를 시작했다. 다운타운을 나가면서부터 시작한 운동이다. 박스를 들고 나를 때마다 감지되는 체력의 한계라니. 방법은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버틸 때까지 버텨보리라고 먹었었다.
팔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에엣……, 여얼 다아서엇…….
겨우 열다섯에 어깻죽지가 뻐근해왔다. 윗몸 일으키기 자세로 바꿨다. 발가락 끄트머리를 침대 모서리에 살짝 걸쳤다. 배치기를 하지 않으면 개도 해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오늘은 쑤욱쑥 잘도 올라갔다. 열두 개까지 해냈다. 다른 보다 개나 많았다. 성공적이다. 허리가 빵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벌떡 일어나 다시 제자리 달리기를 시작했다. 목표는 가슴팍이 콱콱 막혀 숨을 고르 어려워질 , 그래서 체내의 노폐물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 때까지였다. 정확하게는, 낮동안 창고에서 들이마신 먼지가 밖으로 죄다 빠져나갈 때까지였다. 아니, 세상의 모든 더러움이 씻겨내릴 때까지.
하루에도 번씩이나 사장이 직접 바닥에 물을 뿌리고 대걸레질을 해대는 데도 좁은 창고에서 뒹굴다보면 먼지를 뒤집어쓰기 일쑤였다. 대걸레질은 사장이 하는 중에 가장 맘에 드는 대목이다. 종업원들 건강을 위해서라고 한다.
어떻든 안드는 일이니까. 하지만 여느 사장 같으면 바라지도 못할 일이다.
다른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정말 갸륵하고, 기특하고, 이쁨받을 짓이다. 그래도 사장은 사장이다. 사장 생각을 하니까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뜀박질이 더욱 빨라졌다. 슬슬 숨이 가빠졌다. 오래 살고싶다. 아니, 오래 살아야 한다. 건강하게.
어느 순간부턴가 건강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라워했다. 하지만 아버지처럼 허망하게는 가지 않으리라고, 그것 조차도 결코 닮기 싫다고 스스로에게 다지름을 두었다.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팔베개를 베고 누워 좁다란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사각형의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좁았다. 가슴이 갑갑했다. 수꿀한 감정은 분명 가난의 굴레였다. 아버지의 가출에 이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가장으로서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살아가야했던 막막한 심정. 아직 달라진건 없었다. 가슴 속에 촉촉히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전화를 끊고 하우스 도로로 걸어나가자마자 택시가 끼익,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조수석 창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택시 불렀죠, 하고 운전사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정호는 부어라 마셔라로 갑시다, 하고 행선지를 밝혔다. 이민 초기에 잠깐 몸담았던 주간신문사 후배가 손선배 한국 들어간줄 알았다, 얼굴 보고 살자며 호들갑을 떨더니, 택시를 보냈으니 지금 바로 나오라고 연락을 해왔다. 쥐꼬리만한 봉급으론 생활이 안된다는 이유로 그만두긴 했지만 사람 하나는 건진 셈이었다. 최근엔 뜸했지만 퇴사 종종 만나오던 후배였다.
택시는 내쳐 달려나가다 적색신호등 앞에 멈췄다. 운전사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비즈니스 하세요? 다운타운 나갑니다. , 공장하시는군요? 사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벌써 집장만도 하시고. 운전사는 정호를 태운 하우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우스에서 탔으니 집주인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택시 이거, 백날 해봐야 제자리 걸음입니다. 뒷걸음질 아니면 다행이죠, 허허.
아니? 낯설지 않은 허허, 였다. 엄씨의 헤헤, 보다도 아버지의 그것과 비슷했다. 정호는 운전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러나 아버지와 닮은 점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낼 없었다. 택시 운전사는 아버지 보다는 야물딱지게 세상을 살아가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술집은 이미 초저녁 끼니 때를 훑고간 손님들을 한바탕 치러냈는지 입구에서부터 음식물 찌꺼기가 발끝에 걸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종업원들의 이마엔 구슬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발그레한 술기운이 정수리까지 오른 술꾼들이 여기저기서 흔들흔들대며 실낙원을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었다. 너구리 사냥터를 연상케 정도로 실내는 담배연기로 찼다. 천장이 뚫린 파티오라고는 하지만 환기가 제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술자리서 끽연을 원하는 손님들을 끌기 위해서는 흡연이 자유로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당국의 허가를 받아내야 하므로 파티오는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추세다. 그렇게라도 해놓지 않으면 장사가 안되는 형편이니 어찌보면 공급자의 계산과 수요자의 기호가 들어맞는 셈이었다.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정호를 위해 이런 술집만 골라서 불러내는 수잔이었다. 맞은편 구석자리에서 수잔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정호를 불렀다.
"
정말 한국 가신줄 알았어요."
"
본지 며칠이나 됐다구."
"
벌써 보름이 넘었어요."
"
그런가?"
수잔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대학은 한국서 나왔다. 수잔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고국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말도 열심히 배웠고 학부는 한국에서, 그리고 대학원은 이곳에서 마쳤다고 한다. 굳이 한인타운에서 일하겠노라고 고집하는 이유도 때문이었다.
정호는 야무지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곤 했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야만 같았다. 수잔도 그에게 그걸 느끼게 해주는 인물이었다.
"
선배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거예요?"
"
? 그렇지 . 우리 술이나 시키자고."
"
선배님!"
그녀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
듣고있어……."
"
누구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기다리는 사람이라. 사람을 기다리는 일엔 이골이 났다. 기다리는 같으면 일찌감치 그만두기로 작심한지 오래다. 아버지를 기다리다 어머니가 갔고 그렇게 영주가 가버렸다. 기다릴만큼 기다렸고 그리움의 골이 패일만큼 패였다.
"
수잔은 요즘 어때?"
"
눈물나네요. 선배님이 걱정도 해주시고."
삐딱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소줏잔을 찰랑찰랑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주머니에서 담배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수잔."
그녀가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
말이지……. , 기다리지마."
, 기다림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렸어야할 단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단어가 자신의 입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
아뇨. 선배님 맘이 바뀔 때까지 끝까지 해볼거예요. 두고봐요, 누가 이기나."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에 달라붙어 녹진녹진했다. 고래등만한 집채라도 태워버릴 것처럼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던 숯불도 어느새 운명할 시간을 기다리며 깜빡깜빡 졸고있었다. 자정이 돼가고 있었다. 종업원들의 움직임이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그들에겐 이제 하루중 제일 행복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퇴근을 하면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테니까.
갑자기 회귀본능이 발동했다. 막사로 돌아가고픈 생각이 간절해졌다. 커피 하고 가자는 수잔의 제의를 거절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막사 출입구에 누군가 있었다. 주인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옆방 엄씨네 방문을 간헐적으로 똑똑, 두드리고 있었다.
"
무슨 일이세요?"
"
아니 글씨, 냥반 안적 안들어왔는감? 방세 셈할 때가 지났는디."
아무리 방세를 밀렸어도 그렇지, 이런 한밤중에 무슨 무경우란 말인가. 그러나 할머니는 아까 초저녁부터 여러차례 와봤는데 대답이 없어 하도 이상해서 다시 와본 거라고 변명을 늘어놨다. 분명 차는 있는데 사람이 없을리 있냐, 할머니는 의혹스럽게 물어왔다. 가끔은 차를 그냥 세워두고서 잠깐잠깐 나가기도 하는 같다, 는게 정호의 궁색한 대변이었다. 사실 이상하긴 이상했다.
매일 집에만 붙박이처럼 들러붙어 있던 사람이 오늘은 내내 보였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밭은기침을 심하게 해대는게 석연찮은 구석도 있었다. 들어오겠죠, 하며 할머니를 겨우 돌려보내고는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아무리 비좁고 불편해도 내집이 최고였다. 포근했다. 오늘밤은 속에서 그리운 누군가를 만날 것만 같았다. 애써 잊으려한 누군가를.

 


다음날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 막사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였다. 어제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엄씨는 아직 아무런 기별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
, 여기요."
주인 할머니에게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
이게 뭐여?"
할머니는 의아한 눈초리로 정호와 봉투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달 방세는 며칠 전에 이미 치렀으니 그건 아닐테고, 할머니는 정체를 없는 봉투를 선뜻 받기가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
옆방 엄씨가 엊저녁 늦게 잠깐 들어왔었는데, 바쁘다더군요. 혹시 못뵐지도 모르니 대신 제게 맡겨논다고 해서……."
"
어헝, 글면 글치. 퍽이나 바쁜게여. 상허지 말어야 헐틴디."
할머니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맘에도 없는 엄씨의 건강까지 걱정해가며 수다를 떨어댔다.
오늘은 아예 작정을 하고 퇴근길에 은행에 들렀다. 그리 돈도 아니었으니 일일 한도가 정해져 있는 현찰입출금기에서도 충분히 뽑고도 남는 액수였다. 밤마다 노크소리에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돈으로라도 임시변통을 하는게 낫겠다 싶어, 정호는 큰맘 먹고 꾀를 냈다. 알량하지만 자기도 있는 해볼 있다는게 뿌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이후론 절대 막사 근처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이젠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된건지 의레 특유의 헤헤,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그리운건 무슨 조홧속인지.
자동차 트렁크를 열었다. 아직 그대로였다. 남은 이력서를 마지막으로 써볼 참이었다. 낮에 창고에서 뒹굴면서 문득문득 곱씹었던 생각은 이건 역시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 짠밥도 올라가고, 그러면 보수도 따라 올라가고 아랫사람도 늘어 비록 막노동판이라 해도 넥타이부대 보다 훨씬 낫다는 평소 주위사람들의 얘기가 박스를 나르는 동안에는 온데간데 없이 머릿속을 떠나버린다. 그렇게 몇년 구르면서 돈을 모아 장사를 시작하면 그때부턴 고생 , 행복 시작이란 얘기들도 사탕발림에 불과할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아득하기만 했다. 그건 가진 자들의 성공담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차츰 굳어져만 갔다. 넉달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보수에 일꾼들, 변함이 없었다.
장래성을 따지기엔 넉달은 비록 섣부른 기간이긴 하지만 정호가 피부로 느끼는 세월의 무게는 현실 보다는 훨씬 끔찍했다.
서류봉투를 꺼내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장의 이력서를 펼쳐놓고 꼼꼼히 살폈다. 장은 출판사용이었고 장은 신문사용이었다. 경력에 맞추다보니 지원대상 회사가 종류로 좁혀졌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신문사용으로 작성된 이력서 한귀퉁이가 싯누렇게 빛이 바래있었다. 트렁크 안쪽 깊숙히 넣어두었기 때문에 분명 볕에 노출되었을 리는 없었다. 정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냥 제출해도 그다지 문제될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됐는지도 모른다. 역사가 담긴 이력서 같아 그런대로 운치도 있었다.
먼저 장의 출판사용 이력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쓸데가 없었다. 이곳엔 한국어 출판사라고는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남은 신문사용 이력서에 내일 날짜와 연락처를 써넣었다. 누런 서류봉투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달랑 남은 장의 이력서에 자신의 운명이라도 담아넣는듯 손가락이 가느다랗게 떨려왔다.
스산한 가을저녁 하늘에 별똥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떨어져내렸다. 한치 앞도 알아볼 없을 만큼 세상이 온통 암흑천지로 변했다. 집앞 큰길에서부터 소방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예사롭지 않았다. 옆방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할머니였다. 그런데 소리가 많이 달랐다.
이번엔 쿵쿵쿵, 이었다. 문을 부숴버릴 듯한 소리는 결코 노크가 아니었다. 문을 열고 옆방쪽으로 걸어나갔다. 바깥에서 소방대원들이 들이닥쳤고 할머니가 건네준 열쇠로 화급하게 문을 따고는 서너 명이 방안으로 급격히 빨려들어갔다. 이어 하얀 천이 들씌워진 엄씨가 응급침대에 실려나갔다. 방에선 낯선 고린내가 흘러나왔다. 고약했다. 정호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약을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토록 사는게 고통스러웠던 걸까. 달리 방법이 없었을까. 정호는 엄씨의 고통스런 삶과 자신의 치기어린 투정이 교차하는 지점에 발가벗겨진 서있는 기분이었다.
"
어떻게……."
주인 할머니에게 물어보려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얼굴이 사색이 되어 넋을 잃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왔다. 심란했다. 일이야 없겠지, 하면서도 불안했다. 그때 노크소리가 똑똑, 나더니 할머니가 빼꼼 문을 열었다.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아까 봉투였다. 말없이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혼자 남았다. 하얀 봉투를 책상 위에 던져놓고 보니 이력서를 담아둔 노란 서류봉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손가락 끝으로 봉투를 더듬었다. 자신이 한없이 작아져 봉투 속에 갇혀버린 것만 같아 갑갑했다. 정호는 망연자실 초점잃은 눈으로 하염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by KJ (2002.1.5)

 

단편소설 목록으로 이동하기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방인 - 단편소설 -  (0) 2023.01.10
국경의 총성 - 단편소설 -  (0) 2023.01.05
매니저 - 단편소설 -  (0) 2023.01.04
위장결혼 - 단편소설 -  (0) 202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