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WRITER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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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매니저 - 단편소설 -

writerjang 2023. 1. 4. 11:48

"띠이- 치이익 -"

 

인터폰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신호음 소리마저 잡음에 가까워 이젠 이상 누르기도 겁이 났다. 이미 수명을 오래 전에 넘긴 인터폰은 안타깝게도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워했다. 이삿짐을 싣고 짐꾼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벌써 시간째 이렇게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매니저는 아파트 사무실에 없는 분명했다.

 

이제 시간째에 접어들자 이상은 참겠던 짐꾼들 고참으로 보이는 자가 젊은 짐꾼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아주 빠른 스페인어로,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젊은 짐꾼이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다이얼을 재빠르게 찍어 눌렀다. 잠시 그는 유창한 영어로 이삿짐센터에 보고를 했다. 영어를 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마치 나에게 들으라는 소리로 떠들어 댔다.

 

나는 그들을 잠시라도 붙잡아 작정으로 인터폰에 매달려 온갖 불쌍한 척을 하고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킬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볼 작정이었다. 내겐 이상 후퇴할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젊은 짐꾼이 전화를 끊자마자 고참은 의기양양하게 돌아가겠다며 은근히 나를 윽박질렀다. 그는 구색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영어를 마음껏 내뱉고 있었다. 목소리가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다. 나를 궁지로 몰아붙이려는 꿍꿍이 속이 따로 있는 했다.

 

나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날짜칸에는 분명히 30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 확실했다. 시간은 열한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멀쩡히 가고 있는 시계를 고장이라도 것처럼 힘껏 흔들어 봤다. 그러나 애꿎은 시계만 탓할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분명 오늘이 맞는데.....'

이해할 없었다. 미국땅에서만 해도 이사라면 이골이 정도로 다녀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매니저가 이삿날부터 약속을 어기다니, 있을 없는 일이었다.

 

사실은 계약하는 날부터 뭔가 석연치 않았다. 마음에 내키지도 않았는데 아파트를 둘러보자마자 선뜻 결정을 내렸다. 상황도 보통 다급한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어쩔 없는 궁지로 나를 내몰고 있었다. 아파트가 허름한 둘째치고 매니저의 태도와 첫인상도 달갑지가 않았다. 무뚝뚝한 태도에 수가 극히 적은 여자였다. 그녀는 묻는 말에만 대답을 했다. 그것도 '' '아니오' 하나였다.

 

얼굴은 여기저기 기미와 주근께로 덮여 있었다. 눈코입 어디 군데도 줄만한 데가 없었다. 그렇다고 조화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얼굴 생김새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우습지만 무뚝뚝한 그녀의 태도가 꼭꼭 숨어있던 나의 냉소적인 반감을 자극한 사실이었다.

 

나는 여자들의 화장발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화장품은 바로 그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물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화장으로 못생긴 자기 얼굴을 조금이라도 가릴 생각이 추호도 없는 했다. 생김새에 대해서는 이미 초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디로 다시 볼까 두려운 여자였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시 돌아갈 데도 없었다. 어찌 됐든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무 이상했다. 시간 내내 아파트 주변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요일이기는 해도 이렇게 사람의 왕래가 없을 수가 있을까. 아파트 안에도 분명 스물다섯 세대나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정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기분이 나빠지다 못해 점점 음산한 생각까지 들었다. 한인타운 변두리. 그리고 낡을대로 낡아버린 구식 아파트. 지어진 오십 년은 족히 됐을 법한 아파트였다.

 

저쪽 모퉁이를 돌아 여자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빨간 원피스에 노란색 가디건이 그녀의 어깨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매달려 있다는 표현이 아주 적절했다. 그녀의 어깨선을 타고 엉덩이 부분까지 내려간 가디건이 팔랑팔랑 바람에 날렸다.

 

짧은 거리를 걸어 오면서도 그녀는 여러 밭은 기침을 했다. 때마다 어깨가 들썩거렸다. 다리를 휘청거리며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사람구경 것처럼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보다 반가웠다.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무언가를 애원하듯 그녀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언젠가 듯한 얼굴.

 

그녀는 빤히 쳐다보는 행동에 기분 언짢았는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 봐요, 아저씨!"

그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내게 쏘아댔다. 그녀가 뱉은 외마디에는 술기운이 물씬 풍겼다. 밤새 술손님 앞에서 갖은 애교와 아양을 떨며 시달렸을 그녀의 입에서 그런 험한 목소리가 나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간밤 내내 마신 술이라면 많은 양을 들이켰을 분명했다. 벌써 오전 열한 시가 넘었는데 술냄새가 진동했다.

"뭐가 잘못 됐수? 자꾸 사람을 빤히 쳐다봐요!"

그녀가 더욱 거칠게 나왔다.

 

나는 말문이 막혀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하나. 뭔가 대응을 해야하는데. 머리는 그동안 기억의 밑바닥에 묻어 두었던 험악한 단어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끄집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입이 굳어져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어긋난 미국생활의 시작부터 주눅이 살아야 했던 삼년 동안 나는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비록 험악한 욕설이 아니더라도 뭔가 억양이 단어 하나쯤은 튀어나올 법도 했는데.

 

그러나 차마 문장으로 만들어져 나오기에는 시간마저도 너무 부족했다. 나는 급하게 대책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다.

 

", 그런게 아니라......"

짧은 시간 동안 쏟아져 나오려고 발버둥쳤던 많던 험한 단어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입을 거쳐 나온 말은 겨우 정도였다. 완성되지도 않은 어줍짢은 마디.

 

그녀는 초점이 흐려진 눈에 힘을 모아 나를 쓰윽 흘기더니 유유히 앞을 지나 아파트 입구로 다가갔다. 손목에 걸친 조그만 핸드백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열쇠꾸러미를 꺼냈다. 딸깍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 그녀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다 말고 발이 엉켜 중심을 잃었다. 나는 재빠르게 뛰어가 휘청거리는 여자를 잡아주려 했다. 그녀의 몸에 손을 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곧추 세우더니 손을 힘껏 뿌리쳤다. 나는 자리에서 멈칫했다. 여자의 손이 생각보다 매웠다. 적개심이나 반감 같은 독한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면 이렇게 매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돌아서서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오늘은 하나같이 되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자존심이고 뭐고 버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저기요!"

내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짐짓 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졌다.

"여기 사시는 같은데......."

"그래서요?"

그녀는 여전히 사납게 굴었지만 나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이사 들어오기로 했는데 매니저가 없는가봐요."

"그런데요?"

"일단 정문으로 짐을 옮겨야 같은데......."

이제는 반대로 그녀가 나를 꼼꼼히 훑어봤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알아서 하세요."

" , 고맙습니다!"

나는 그나마 아쉬운 대로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녀는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곤 횡하니 아파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문이 닫힐세라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반쯤 닫힌 문을 간신히 잡았다.

 

그런데 이제부턴 어떻게 해야하나. 정문으로 이삿짐을 옮긴다는 배나 어려운 작업이었다. 주차장 쪽으로 옮기면 훨씬 수월할텐데.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일단은 매니저가 나타날 때까지만이라도 이렇게 짐을 나르는 수밖에는. 멕시코인 짐꾼들의 입이 삐죽 나왔다. 이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동작만큼은 아주 시원시원했다. 어느새 트럭 뒷부분의 짐칸 문을 열고 받침대를 내려 놓았다. 나는 사이에 우편함 주변에서 종이 쪼가리를 찾아 문틈에 끼워넣었다.

 

짐꾼들이 꽤나 무게가 나가는 3인용 소파를 들고 낑낑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거들기 위해 문을 활짝 열고는 붙잡고 있었다. 그들이 아파트 안으로 소파를 들이밀고 입구를 통과하기 쉽게 몸을 옆으로 살짝 비껴 때였다. 얼핏 주차장의 출입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주차장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문은 열린 채로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는 말인가?'

 

분명히 아까는 주차장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로 활짝 열려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입주하기로 106호로 보았다. 거기도 역시 방문이 열려 있었다. 침실이 따로 없는 싱글룸이었기 때문에 공간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와중에도 머릿속은 많은 이삿짐이 걱정이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좁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매니저가 아파트에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제 생각은 확신에 가깝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영문이야 어떻게 되었든 일단 짐꾼들에게 차를 주차장 쪽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제야 일이 제대로 되려나 보다. 이삿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짐꾼 사람이 부지런히 나르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버리긴 많이 버렸나 보다. 아픈 상처를 기억나게 할만한 물건들은 죄다 처분하려고 기를 썼다. 그녀와 함께 단꿈을 꾸던 생애 보금자리를 떠나면서 미련의 앙금마저도 함께 묻어버리려 했던 몸부림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이제야 같다.

 

짐꾼들에겐 통상적인 팁의 두배를 건네줬다. 그러자 순식간에 도도했던 태도가 돌변하면서 그들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느라 바빴다. 역시 돈이 최고였다. 누구도 부인할 없는 황금의 막강한 . 최소한 지금 생각엔 그랬다.

 

그들을 떼밀다시피 돌려보내고 나니 맥이 빠져버렸다. 이삿짐을 정리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시간 동안의 기다림이 마치 영겁의 세월을 보낸 힘에 겨웠다. 결국 나는 이불보따리 위에 그대로 쓰러져 밑도 끝도 없는 수면의 나락으로 곯아 떨어져버렸다.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단잠에서 깨어난 시간은 다음 이미 해가 중천에 있을 때였다. 서둘러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한쪽 눈을 질끈 감은 닥치는 대로 정신없이 옷을 주워 입었다. 풀린 다리를 어렵게 이끌고 방문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벽시계를 올려다보는 습관적인 행동은 빼먹지 않았다. 이젠 동물적인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오랫동안 몸에 습관이었다.

 

그러나 사방 벽면을 두리번거렸지만 시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계는 아직 벽에 걸려있지 않았다. 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다시 책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손목시계가 놓여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이 월요일이던가? 넋을 잃고 막연한 기다림으로 보낸 숱한 시간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세월 가는 것도 까마득하게 잊은 일년을 보냈다. 요일 같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이틀 시간이 흐르는 부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맞다. 어제 그대로 잠에 곯아 떨어진 다음 목이 너무 말라 깨어났었지. 간신히 몸을 일으킨 시간이 저녁 8시쯤이었을 거다. 창문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지. 나는 조금이라도 짐을 정리할 양으로 잠을 쫓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간쯤 부산하게 움직였던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같은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언제 잠이 들었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비몽사몽간에 짐정리를 한다고 덤비기는 같은데 지금 보니까 제자리를 제대로 찾아간 물건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벽에 걸려 있어야 물건들이 여전히 입구쪽에 마구잡이로 쌓여 있었다. 밤이 늦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못을 박을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누구세요?"

문쪽을 향해 소리를 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파트로 이사 아는 사람이 있을 없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나를 찾아올 사람이 미국땅에는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이제 삼년쯤 되어 가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친 경계심만 몸에 잔뜩 배어 있었다.

 

우선 문짝 한가운데 달린 렌즈구멍으로 복도의 방문객을 살펴봤다. 아무도 없었다. 문을 빠끔히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옆집 앞에서 얘깃소리가 들렸다. 문을 조금 열고 문고리를 붙잡은 몸을 반쯤 바깥으로 내밀었다.

옆집 앞에는 전에 봤던 매니저가 우두커니 서서 안쪽으로 전단지를 건네주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옆집 세입자는 아파트 안쪽에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만 간간히 흘러나왔다. 목소리로 봐서는 젊은 여자임이 분명했다.

 

"이건 무슨 월례행사 같은 건가 보죠?"

그녀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매니저에게 툭툭 말을 던졌다. 뭔가 기분이 상했다는 그런 말투였다. 그러나 매니저는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 대꾸가 없었다.

 

"어차피 다들 알텐데 이렇게 일일이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세입자들이 전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도 아니고, 바보들도 아닌데......."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매니저의 대꾸가 없자 그녀도 이젠 지쳤는지 이내 말끝을 흐리고야 말았다. 그들의 대화, 아니 옆집 여자의 일방적인 항의는 여기서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그들 대화의 공백에 끼여들었다.

", 여기요!"

작은 목소리도 적막의 순간에는 엄청 크게 들렸다. 더욱이 통로가 좁은 탓에 목소리는 복도를 달려 저쪽 끄트머리에 부딪히는 순간 쩌렁쩌렁 울렸다.

 

매니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여전히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옆집 여자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젊은 여자였다. 그와 동시에 아래쪽에서 조그만 여자 아이가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다. 다섯 살쯤 됐을까?

옆집 여자가 재빠르게 튀어 나와 여자 아이를 낚아 갔다. 마치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는 장면과 흡사했다.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다른 손바닥을 펼쳐 아이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동작이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먹이사냥에 나선 맹수처럼.

 

"가시나가 이렇게 말을 들어!"

안쪽에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차례의 매질에 아이가 울음보를 터트리고야 말았다. 아무리 미국땅에 살아도 어쩔 없는가 보다. 요즘엔 그래도 많이 없어졌겠지만 온동네가 부모들의 매질로 시끄럽던 날이 그다지 옛날 얘기는 아니었다. 아마도 가난이 연출하는 살풍경이었으리라.

 

" 그치지 못해!"

안쪽에서 일갈이 터져 나오더니 문이 쾅하고 닫혔다. 치도곤을 당할 아이와 빗자루를 들고 설쳐댈 아이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제도적으로 아이와 노인의 편에 기울어져 있는 미국이란 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이제 그런 구습에서 벗어났다고 믿어왔는데. 더군다나 저렇게 젊은 주부들에겐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을 오늘 보고야 말았다.

 

매니저가 쪽으로 걸어왔다. 역시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정말 생겼다. 나이는 마흔 정도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딘가 어색하게 늙어 있었다. 짙은 밤색 스웨터 소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그녀의 손마디와 팔뚝은 전혀 사십대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시죠?"

어제의 일을 거론해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내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그녀 역시 예상대로 어제 얘기는 꺼낼 생각도 없는 보였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나의 속내로부터 분노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렇다한 변명이라도 해주길 은근히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순간 그녀가 오랜만에 말을 꺼냈다. 물론 완벽한 문장으로 구성된 말일 리가 없었다.

"저기......."

말을 최대한 자제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못하는 아니라 하려는 같았다.

"어제 죄송했어요.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어제 일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이 아주 간단하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선은 멀거니 발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의 그녀를 보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했다. 정말 여자는 말이라는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내게도 전단지를 내밀었다. 엉겹결에 손을 내밀어 받았다.

전단지는 특이했다. 일년동안 다른 아파트에 살아봤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매니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렌트비를 종용하는 안내장을 배포하는 적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같은 모두가 이용하는 시설에 안내문을 붙이는 봤어도 이런 장면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계약할 이미 이번 렌트비를 선불로 냈기 때문에 전혀 필요 없는 전단지였다. 그녀가 내게도 전단지를 주는 의도는 무엇일까. 미리부터 렌트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안내장을 건네준 매니저는 아무 없이 다음 집으로 가버렸다.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옆집 여자가 문을 빠끔 열었다. 이미 아이와 한바탕의 전쟁을 마친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가 승리를 거뒀겠지만. 승리의 여신은 언제나 아이 보다는 엄마들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여자가 바깥으로 성큼 걸어나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녀는 배가 불러있었다. 모르긴 해도 7개월이나 8개월쯤 되어 보였다. 딸아이 하나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여자의 남편도 그녀와 어지간히 비슷한 사람일테고, 그녀의 행동거지로 봐선 그들 부부는 당연히 아들을 낳을 때까지 마냥 밀어붙일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앞에서도 그녀는 매니저 얘기를 하면서 비아냥거렸다.

 

"기분 나빠하실 없어요. 여자 원래 저래요!"

"?"

나는 옆집 여자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느라 대답이 시원찮게 나왔다. 원래 저렇다는 의미는 무얼까? 그러나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여자의 다음 말이 바로 해결해 줬기 때문이었다.

" 처음에 여자 벙어리인줄 알았어요."

"? ....."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도 답답한 일이 많이 쌓였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 여자 나이가 살인 알아요? 이제 겨우 스물아홉이래요. 고생을 사서 하니 저렇게 겉늙지."

"?"

나도 너무 놀랐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려 십년이 넘게 나이를 착각하게 만드는 그녀의 용모는 뭐란 말인가. 그럼 나하고 동갑이란 얘긴데. 그리고 나이에 아파트 매니저라니. 아무리 조그만 아파트지만.

 

이번에도 고민 중의 하나는 여자가 간단하게 해결해줬다.

" 여자가 아파트에서 최고참이래요. 십년이 넘었으니. 그래서 매니저도 하는 거고. 이런 아파트에 십년 넘도록 사는 보면 어지간해요, 여자."

 

여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잘도 떠들어댔다. 북치고 장구치고, 묻고 대답하고. 한마디로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별로 웃기는 얘기가 아니었는데도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바로 쉴새 없이 말이 쏟아져 나오는 여자의 수다스런 입모양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느다란 입술이 하도 빨리 움직여 얼굴에 입만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저렇게 악착 같이 렌트비를 받아내지 않으면 매니저 일도 해먹지, 그럼. 저거 빼면 여자는 시체나 다름없지......."

이젠 아예 혼잣말로 떠들어댔다. 내가 듣든 말든 그런 개의치 않았다.

 

머리가 아파왔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한꺼번에 소화하려 했나보다. 갑작스럽게 쏟아붓는 여자의 말들 속에서 무엇을 걸러내야 할지 난감했다. 머릿속이 지근지근 아파왔다.

 

" 뭣에 쓰는 몰라!"

여자의 말은 점점 내가 받아들일 있는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알아들을 없는 얘기였다. 나는 매니저와 대면한 오늘로서 번째였다. 그것도 아주 잠깐동안만. 여자의 말을 판단하기엔 아직 너무 겪어 없었다. 그래도 여자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했다.

 

" 여자 사람도 부르고 웬만한 자기가 직접 해요. 청소나 고장난 것들. 그러니 아파트에 이렇게 문제가 많을 수밖에!"

나는 이제 이상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다. 틀린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쏟아붓는 말들을 제대로 판단할 자신이 아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그녀 말의 진위를 가릴 필요까지는 없을 몰라도.

 

"자기가 무슨 대단한 기술자라도 되는 아나보지? 주인한테는 수리비 받아서 챙길테지, 아마!"

앞집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 분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여자를 째려보며 날카롭게 마디 쏘아붙였다.

"어허, 그래도 !"

여자는 다음 말을 하려다 말고 할머니를 보자 그쳤다. 다만 그녀는 입만 샐쭉거릴 뿐이었다.

나는 갑작스런 할머니의 등장에 몹시 난처해졌다. 무안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할머니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 어제 이사온 총각이구만."

할머니는 마지못해 내게 답례했지만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시 여자를 향해 혀를 끌끌 차고는 문을 닫고 들어갔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괜히 나한테만 저러셔."

혼잣말로 떠들어대던 여자는 다시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싫어하는데 유독 할머니네만 감싸고 도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여자는 불만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는 굳게 닫힌 앞집 문을 향해 혀를 낼름거렸다. 그런 그녀가 버릇 없는 철딱서니 같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왔다.

"매니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러시나, 그래?"

나도 이젠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여자의 얘기를 듣다가는 판단력이 흐려질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인상까지 찌푸리며 듣기 싫은 내색을 했다. 그녀는 얼핏 눈치를 채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마디를 덧붙이고야 말았다.

 

"아무튼 그러고도 매니저라고 주인한테 돈은 받아낼거야, 아마."

나는 여자의 마지막 말을 뒤로 복도 벽에다 대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주고는 아파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자가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녀도 엉겹결에 고개를 수그렸다. 복도 저쪽 반대편에서 매니저의 것인 듯한 밭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참다 못해 어쩔 없이 터져 나온 그런 종류의 기침 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아파트 문을 닫았다. 여전히 이삿짐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혼자 사는 남자의 가재도구라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가구들은 대부분 2인용이었다.

 

침대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킹사이즈였다. 싱글룸에는 어울리지 않은 크기였다.

침대를 장만하면서 없이 좋아했던 미연의 얼굴이 아련한 기억 편에서 꿈틀거렸다.

킹사이즈를 선택한 바로 그녀였다. 나는 아파트 규모에 맞게 적당한 크기로 하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가 그녀만의 독특한 의견 앞에서는 맥을 추고 무너지고 말았다.

넓은 침대를 쓰게 되면 재벌의 안주인도 부럽지 않을 거라던 그녀의 얘기. 어차피 만큼은 누구나 침대를 벗어날 없기 때문에 아마 세상에서 자기만한 부자는 없을 거라며 그녀는 내게 환한 미소를 보냈었다. 침대 이상은 해줄 능력이 없다며 괴로워하던 가난한 나를 위로하려는 그녀의 깊은 배려였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녀와 함께라면 씩씩하게 이겨낼 자신이 생겼다.

 

미연을 만난 미국으로 건너온 달만이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달만에 구한 직장은 한인타운에 있는 조그만 인쇄소였다. 나는 그나마 한국에서 인쇄기술을 배워두었던 덕에 아무런 신분도 없이 일자리를 쉽게 구할 있었다. 미연은 인쇄소에 다니고 있었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그녀 역시 5년전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와 시작부터 힘겨운 이민생활을 경험한 터라 누구보다 처지를 이해했다.

 

첫날부터 좋은 감정에 이끌리던 우리 사람은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한달 만에 인쇄소 사장의 배려 아래 우리는 동거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혼할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동거를 시작한 보름도 어느 , 낯선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그녀의 과거가 속속들이 귀에 전해졌다. 나를 경악스럽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녀에겐 이미 세살난 아이가 있었고 동부의 조그만 도시에 살고 있는 그녀의 언니에게 맡겨져 있다는 얘기였다.

 

갈등이 심했지만 그녀에게는 전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결코 그녀를 잃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는 그녀 스스로 고백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원한다면 아이까지 거두겠다는 결심까지도 세워두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저녁 갑자기 집을 뛰쳐나간 그녀는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이별이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이제나 저제나 그녀가 돌아올 것만 같아 나는 아파트에서만 꼬박 일년을 기다렸다. 다니던 인쇄소는 면목이 없어 그만 두게 되었다. 그리고는 지금껏 그저 허망한 세월만 보냈다. 누구도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수렁으로 빠져드는 자괴감을 이기지 못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짐꾸러미를 앞에 두고 좁은 안에 혼자 있자니 더욱 서글픈 마음만 깊어졌다. 정리는 커녕 지난 일들이 떠올라 아련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창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 아파트가 제대로 있는 없어! 도대체 세탁기는 언제 고쳐 줄거요?"

사십대 남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음색이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그의 입에서는 아파트 시설에 대한 불만이 가득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매니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저렇게 화가 나서 펄쩍 뛰는 사람 앞에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는 배길 일이다. 고개만 수그리고 선처를 바라고 있을 매니저의 얼굴이 상상되었다.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잘잘못이야 어찌 됐든 지금은 매니저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싸구려 아파트라 해도 있는 시설마저도 제대로 사용할 없다면 그것 또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생활비도 이중으로 들게 생겼다. 이제 새로운 직장에 나가기로 했지만 3 동안 벌어놓았던 돈은 이미 바닥이 드러난 되었다. 가재도구 가지 팔고, 있는 없는 긁어 모아 입주비용만 간신히 마련할 때의 비참했던 심정이 되살아났다.

 

여자의 몸으로 아파트 생활시설을 직접 보수한다니 참으로 능력이 대단해 보였다. 그러나 옆집 여자의 말대로 제대로 처리하는 아니라면 주민들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을 터였다. 벌써부터 내심 아파트에서 생활할 일이 끔찍스러워졌다.

매니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세상의 온갖 험한 일이라면 겪어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끔찍하게 못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몸매 만큼은 힘쓰는 일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허약한 쪽에 가까워 보이는 그녀가 아파트 보수를 도맡아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바쁘게 몸을 놀리는 사이 대충 짐정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살림살이가 하나둘씩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파트도 이젠 제법 사람 사는 곳으로 탈바꿈해가고 있었다. 어두웠던 마음도 차츰 나아졌다.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 때부터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니까 배에서 신호가 오는가 보다. 시간은 오후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벽에 못질할 일은 일단 허기부터 채우고 나서 하기로 마음 먹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파트 문이 뻑뻑했다. 그걸 여태 몰랐었다. 지금에서야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다. 여태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차장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주차장 입구를 통과하다 말고 나는 멈칫 걸음을 멈췄다. 매니저와 마주쳤다. 그녀는 중노동을 하고 있었다.

 

주차장 입구쪽에는 쓰레기 집하장이 있었다. 얼마동안 모아둔 쓰레기인지 몰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녀는 손에 하얀 면장갑을 땀을 뻘뻘 흘리며 쓰레기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음식물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럴 어떻게 처신해야 아주 난감했다. 도와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모른 해야 하는 건지 수가 없었다.

자기 일을 하고 있는데 굳이 도와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여자가 비지땀을 흘리며 억센 남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을 하는 보고 그냥 지나치자니 마치 자신이 파렴치한이라도 같은 죄책감이 앞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어쨌든 빨리 결정을 해야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마냥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의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에서는 밭은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쓰레기와의 씨름 보다도 그녀에겐 기침을 참으려는 노력이 고통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식을 못하는 그녀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저기요, 내가 해봅시다."

 

나는 그녀가 놀리고 있는 삽에 손을 댔다. 삽을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삽을 빼앗기에는 그녀의 손아귀 힘이 너무 완강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나를 올려다 봤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아무런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고집불통에 외골수......

밖에는 달리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고생을 하건 말건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괜히 나섰다가 뒤늦게 후회했다.

 

매니저는 일을 계속했다. 미련해 보이는 그녀의 등짝을 바라보며 나는 주차장에서 차를 뽑아 밖으로 나갔다.

옆집 여자의 말을 고지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매니저의 저런 성격이 주민들에겐 불만거리가 되고도 남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친화되지 못하는 별난 성격.

 

넘도록 저렇게 억척으로 일을 해왔다면 꽤나 모았을텐데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보면 옆집 여자의 말이 맞는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거야 내가 아니었다. 매니저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파왔다. 어제 이사 때부터 속을 썩이더니......

앞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을 같은 불길한 조짐이 느껴졌다.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나가는 편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파트에 머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고 싶은 맘이 생겼다.

 

점심을 대충 햄버거로 때웠다. 햄버거도 이젠 제법 입에 적응이 되었나 보다. 일주일에 꼬박 서너 번씩은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생각이 없을 그나마 햄버거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다시 아파트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세시 쯤이었다. 차를 아파트 쪽으로 몰아가다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나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아파트 앞에는 온통 소방차와 경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변엔 구경꾼들이 몰려나와 웅성대며 아파트 쪽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연기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선 화재사고는 아니었다. 헬기가 뜨지 않은 보면 강도사건도 도주사건도 아니었다. 무슨 다른 사고가 틀림없었다.

 

소방차나 경찰차가 출동하는 장면을 한두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경우가 달랐다. 무척 당황스럽고 놀라웠다. 이사를 오자마자 후회스러웠던 마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놀랍다 못해 이젠 충격스럽기까지 했다. 우환이 끊이지 않을 같은 예감이 적중했기 때문이었다.

 

차를 도로변에 멀찌감치 세워두고 아파트 정문쪽으로 걸어갔다. 경찰들과 소방대원들의 신속한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방호스로 물을 뿜어내지 않는 보면 역시 화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사고가 났기에 아파트 정문을 드나드는 저들의 움직임이 저토록 부산한 걸까.

 

들것을 소방대원들이 급히 아파트에서 나오더니 소방 앰뷸런스 쪽으로 뛰어갔다. 들것에는 어린애가 누워 있었고 옆으로 아이의 젊은 부모들이 바쁘게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엄마는 소리로 울어대며 소방대원들의 들것을 정신없이 따라갔다.

 

들것이 앰뷸런스에 실리고 소방관과 아이의 부모들이 차례대로 따라 오르더니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앰뷸런스는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문 옆쪽으로 매니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경찰관들과 소방대의 지휘자로 보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상황설명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주 유창한 영어로, 그것도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사고 때문에 놀란 터에 그녀가 나를 놀라게 했다.

 

소방대원 명이 그녀의 얘기를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상황이 종결되고 사건의 정황을 진술하는 모양이었다.

구경꾼들 속에 옆집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역시 묻지도 않았는데 사건에 대해 수다를 늘어 놓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번엔 내가 먼저 물어볼 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버렸대요. 안에 애가 갇혀 있었구요."

긴장된 어조로 말을 하면서 여자는 자기의 아이를 바싹 끌어안았다. 마치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아이가 자기 애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

 

역시 한마디 뱉은 것으로 수다를 끝낼 여자가 아니었다.

"제가 뭐랬어요. 여자 사고친다고 했잖아요. 여자 이제 났어!"

 

시작이다. 이런 위급한 와중에도 옆집 여자는 매니저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바빴다.

"매니저가 잘못했나요?"

내가 물었다. 사건 정황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옆집 여자는 자기에게 따지는 알고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매니저가 잘못을 했다기 보다는......"

여자는 일단 말꼬리를 흐렸다.

"어쨌든 아파트에서 이런 사고가 났으니 매니저가 책임져야 하는 아닌가요?"

 

이건 무슨 얘긴가. 여자는 단순히 매니저를 험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매니저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의중이 여자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했다.

 

그러면 그렇지. 묘하게도 매니저 자리는 신기한 매력이 있었다. 고생스럽고 힘든 일이라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단 아파트는 공짜로 얻어 산다. 미국에서 매니저는 최고의 직업이라는 평판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 일자리임에는 틀림없었다.

 

하기야 달리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주부들에겐 그것 만큼 편하게 앉아서 렌트비라도 절약할 있는 좋은 방법이 따로 없었다. 아마도 여자는 그런 계산 때문에 매니저 자리를 탐내고 있는 분명했다.

 

매니저가 주민들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주민들에게 목소리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나를 놀라게 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제 일이 해결됐으니 들어들 가세요.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매니저는 고개까지 조아리며 주민들 앞에 정중하게 사과했다. 발음도 또박또박 했다.

 

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경찰차량에 올라탔다. 아마도 아까 실려간 아이의 가족을 따라 병원으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매니저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했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주민들이 웅성웅성 대며 하나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 "

문득 이사오는 만났던 술집 아가씨가 떠올랐다. 바로 목소리였다. 물어볼 사람은 물론 옆집 여자 밖에 없었다.

"저기요....."

", 왜요?"

"혹시 매니저 집에 여자 형제가 같이 사나요?"

"글쎄요...... 여동생이 있는데 술집에 나간다죠, 아마."

 

, 그랬구나. 그럼 술집여자가 바로 매니저의 동생. 그래서 목소리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닮았었나 보다. 밭은 기침소리까지 같았다. 화장기 때문에 분명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자매는 아주 생김새까지 흡사했다. 다만 자매는 말투나 말수에서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

 

"저도 여동생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번도 적은 없어요."

옆집 여자는 아파트에 일년 넘게 살았다고 들었는데 아직 매니저의 동생과는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고 했다. 술집에 나가서 그런가. 밤낮을 바꿔서 살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수가 적고 무뚝뚝한 매니저. 융통성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여자. 게다가 술집에 나가는 동생까지 딸려 있는 사람에게 매니저 자리를 맡긴다는 이해할 없는 일이었다.

 

여자가 말을 하다말고 슬금슬금 아파트로 들어갔다. 저번에 앞집 할머니네 부부가 구경꾼들 속에서 여자에게 눈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부부는 언제나 매니저 편이었다. 매니저를 감싸고 도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겪을수록 의문만 커지는 아파트였다.

 

매니저는 늦은 시간에 돌아왔다. 심각한 범죄가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경찰이 붙잡아뒀을 리는 없을테고, 아마도 변을 당한 아이의 병원에서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아파트 사무실로 사용하는 매니저의 아파트로 가려면 공교롭게도 아파트를 지나야 했다. 아파트는 1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었다.

 

로비에서부터 엘리베이터가 올라와 덜컹 하고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여자의 지친 발소리. 그리고 발소리는 아파트를 지나 매니저 사무실 쪽으로 이어졌다. 통로 끝의 매니저 아파트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이어 철컥하고 조용히 닫히는 소리까지 들렸다. 소음이 잦아든 고요한 밤중엔 복도의 발소리가 아파트 안에서도 크게 들렸다.

 

잠시 매니저 사무실 현관문이 딸깍하고 열렸다. 이번엔 여자들 특유의 빠른 종종걸음이었다. 발소리는 빠르게 엘리베이터 비상구로 사라졌다.

 

아까의 발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발걸음에 실린 체중은 아까 매니저의 그것과 흡사했다.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그녀는 이미 비상구를 타고 로비로 사라진 뒤였다. 엘리베이터 옆으로 있는 창문으로 바깥 길거리를 내다봤다. 택시가 아파트 정문 앞에 정차해 있었다. 방금 전에 비상구를 빠져나간 그녀가 아파트 정문을 열고 바깥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어제 마주친 술집 여자였다. 매니저의 여동생이라는 여자. 뒷모습만 보였지만 오늘은 옷차림새가 어제하고는 달랐다. 정장스타일의 감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치마가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였다. 어제 노란색 가디건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여자는 택시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틀어 택시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안전벨트를 찾느라 고개를 창문쪽으로 돌렸다.

 

"아아니?"

나는 차창으로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곧바로 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매니저였다. 아무래도 이제 놀랄 일은 이상 없을 같았다.

 

나는 아파트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매니저의 못생긴 얼굴과 술집여자의 화장기가 잔뜩 얼굴이 쉴새 없이 교차되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다음날 늦게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잠이 들었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깥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시간에 깨어나기는 힘들었을 거다.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문을 빠끔 열었다. 주민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매니저 사무실 현관에서 소방구조대원들이 들것을 불쑥 튀어나오더니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바쁘게 이동했다.

 

들것에는 매니저가 길게 누워 있었다. 그녀는 얇은 담요 밖으로 머리만 달랑 나와 있었다. 머리가 심하게 헝크러져 있었다. 뭔가에 시달리며 몹시 괴로워했던 표정이 역력했다. 감은 눈가엔 눈물이 방울방울 고여 있었다.

 

" 여자...... 아니 매니저가.....흑흑."

옆집 여자가 말을 하려다말고 울음을 터트렸다. 상황이 심각한 분명했다. 옆집 여자가 그녀를 매니저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도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옆집여자가 눈물을 훔치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폐렴이래요."

"네에? 위험하답니까?"

"아니요. 생명엔 지장이 없대요."

"다행이군요."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아직 매니저와 별다른 친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모양을 수는 없었다. 죽음 앞에 냉정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런데......"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면서도 말발은 결코 죽지 않았다.

", 말씀해보세요."

"그렇게 억척스럽게 돈을 전부 한국으로 보내고 있었대요......"

"한국에요?"

". 한국에 늙은 어머니가 계시는데 벌써 십년째 지병으로 병원신세를......흑흑."

 

, 그랬구나. 매니저 벌이로는 그걸 감당할 없었겠지. 그래서 술집도 나갔고. 자신의 병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살아왔구나.

 

그녀에 대한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고 있었다.

 

나중에 사실이지만 노부부는 아파트 소유주의 부모였고 그들의 추천으로 그녀가 매니저 자리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부부는 아파트 주인인 아들이 자기 집에 모시겠다는 뿌리치고 굳이 아파트에서 살기만을 고집해왔다.

 

그들은 매니저의 속사정을 알게 뒤부터 딸처럼 어여삐 여겨왔다. 그리고 노부부와 매니저는 서로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방과 노부부의 방에는 쌍방향으로만 전달되는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폐렴이 심해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벨을 눌렀고 노부부의 신고로 구조요원이 출동해 그녀의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쌓여만 가던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다.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난한 우리네 한국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보았다.

 

오늘은 가슴 저리도록 우리의 소주가 생각나는 날이다. 오랜만에 낮술로 시린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 by KJ 20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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