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WRITERJANG

소박한 글쓰기

단편 5

빛바랜 이력서 - 단편소설 -

후줄근하게 젖은 작업복 밑동을 꼭 쥐고 툴툴 털어냈다. 언뜻 보기엔 앞가슴에 들러붙은 먼지구뎅이를 털어내려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정호의 의도는 딴 데 있었다. 두어 시간째 나르고 있는 한 컨테이너 분량의 박스를 퇴근 전까지 모조리 창고에 쟁여넣느라 온몸이 후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중국산 여행용 가방이 빼곡히 담긴 박스였다. 두 달 전에 선적돼 머나먼 뱃길을 달려온 컨테이너가 산페드로 부두에서 다른 회사 수입품에 엮여 쿼터 초과 시비로 싸잡아 걸려드는 바람에 무려 한 달 동안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오늘 간신히 빼내오긴 했는데 오후 네시쯤에야 겨우 풀려 이제사 창고까지 배달됐다고 한다. 물론 사장의 엄살섞인 넋두리를 귀동냥해서 알게된 정보였다. 사장은 부득이 퇴근시간이 늦어지더라도 몽땅 창고 깊숙이 쟁여넣..

단편 2023.01.17

이방인 - 단편소설 -

대만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는 뉴욕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가고 있다. 함께 탑승한 사람들이 품은 한의 무게를 모두 합하면 천근만근도 넘으련만 비행기는 이를 무시하듯 잘도 날아간다. 나를 비롯해 함께 미국행에 오른 사람은 모두 여섯 명. 안내원을 뺀 나머지 다섯 명은 모두 정상적으로는 미국 땅을 밟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서울 종로통을 수도 없이 헤맨 사람들이다. 겨우겨우 이주공사를 잡고 대만을 경유해 미국땅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대만에서 가짜 비자를 만들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잘나가던 사업체가 하루 아침에 부도를 맞아 무작정 도피하는 사십대 후반의 중소기업 사장 김 아무개. 가족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갔는데 자신만 서류가 누락돼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

단편 2023.01.10

국경의 총성 - 단편소설 -

"삐리리리!" 제임스는 창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다 말고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사무실에 걸려온 전화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방음시설이 미비한 낡은 건물이라 가끔 옆 사무실 전화를 자기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즘엔 하루 온종일 도통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삐리리리!" 두 번째 벨이 울렸다. 그제서야 제임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창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콧잔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오른손으로 쓸어올리며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재떨이에 담배를 잽싸게 비벼 껐다. 정말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요즘엔 일거리가 별로 없어 매일 한가하게 세월만 죽이고 있었다. LA 바닥에 이민브로커 사무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나..

단편 2023.01.05

매니저 - 단편소설 -

"띠이- 치이익 칙-" 인터폰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신호음 소리마저 잡음에 가까워 이젠 더 이상 누르기도 겁이 났다. 이미 수명을 오래 전에 넘긴 듯 인터폰은 안타깝게도 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워했다. 이삿짐을 싣고 온 짐꾼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벌써 한 시간째 이렇게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매니저는 아파트 사무실에 없는 게 분명했다. 이제 막 한 시간째에 접어들자 더 이상은 못 참겠던 지 짐꾼들 중 고참으로 보이는 자가 젊은 짐꾼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아주 빠른 스페인어로,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젊은 짐꾼이 차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다이얼을 재빠르게 찍어 눌렀다. 잠시 뒤 그는 유창한 영어로 이삿짐센터에 보고를 했다. 영어를 곧 잘 했다. 나를 ..

단편 2023.01.04

위장결혼 - 단편소설 -

어느 무더운 여름 오후, 언니는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로 햇볕을 모두 차단시킨 거실에 넋을 잃고 주저앉아 새까맣게 변색된 한쪽 눈에 달걀을 정성스럽게 문지르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는 낡은 시민아파트의 거실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의 사막기온을 견디다 못해 일그러진 플라스틱 모양으로 늘어져 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나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언니는 가냘프게 흐느끼며 달걀 쥔 손을 느릿느릿 원형을 그리며 놀리고 있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나는 놀라움에 한참을 그렇게 장승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손찌검까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느닷없는 출현을 눈치챈 듯 언니는 어느새 끝이나지 않을 것 같던 손놀림을 멈췄고, 더 이상 흐느낌도 없이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련히 꿈만같..

단편 202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