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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국경의 총성 - 단편소설 -

writerjang 2023. 1. 5. 05:08

"삐리리리!"

 

제임스는 창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다 말고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사무실에 걸려온 전화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방음시설이 미비한 낡은 건물이라 가끔 사무실 전화를 자기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즘엔 하루 온종일 도통 전화 걸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삐리리리!"

번째 벨이 울렸다.

 

그제서야 제임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창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콧잔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오른손으로 쓸어올리며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재떨이에 담배를 잽싸게 비벼 껐다.

 

정말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요즘엔 일거리가 별로 없어 매일 한가하게 세월만 죽이고 있었다. LA 바닥에 이민브로커 사무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나는 바람에 경쟁이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요즘엔 이민국의 단속이 심해 경기가 한풀 꺾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이에 전화벨이 울렸다. 벨소리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급하게 재촉하는 소리로 들렸다.

온몸이 긴장감으로 잔뜩 움츠러들었다. 우선 호흡을 가다듬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에 힘껏 내뱉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나서 수화기를 들었다. 긴장을 감추며 태연스럽게 수화기에 대고 운을 띄웠다.

"여보세요?"

 

상대편에선 말이 없었다. 제임스는 다시 수화기에 대고 분명하게 자신을 밝혔다.

", 유학원입니다. 말씀하세요!"

"저기……"

상대편에서 반응이 왔다. 젊은 여자였다.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들렸다.

 

", 말씀하세요."

"상담을 있을까요?"

손님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을 놓을 단계가 아니었다.

 

"네에, 물론이죠. 유학생이세요?"

"아니요. ……"

"그럼 무슨 일로?"

수화기를 타고 여자의 엷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아니, 여보세요?"

"흑흑……"

차분했던 여자의 목소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흐느낌만 간간히 들려왔다. 굵직한 건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제임스가 다짜고짜 넘겨짚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가 보군요. 뭐든 상관없어요. 누굴 데려와야 합니까?"

"……"

예상이 적중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는 바닥에서만도 벌써 십년 넘게 굴러먹었다. 그도 이젠 베테랑 축에 속했다.

 

"데려와야 사람이 누군가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아니, 그러지 말고 나오세요!"

"저기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 그럼 그러시든지……"

제임스는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덤빈건 아닌지 조금 후회스러운 눈치였다.

 

여자는 무슨 말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종류의 의뢰를 요청해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사연이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망설이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브로커들을 구세주처럼 대하면서도 한편으론 자기들이 손님이랍시고 당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다시 전화를 하겠다던 여자는 며칠이 지난 직접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녀는 낮게 흐느끼기는 했지만 먼저번 처럼 망설이거나 주저하지는 않았다. 미리 연습이라도 것처럼 자기의 사연을 줄줄 털어놨다.

 

여자가 돌아간 제임스는 고민에 빠졌다. 그녀 앞에서는 염려말고 기다리라고 자신있게 말은 했지만 내심 걱정이었다. 요즘 이민국의 단속이 강화되면서 누구든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에 뛰어들려고 하지 않아 믿고 쓸만한 사람이 없었다.

제임스는 고민 끝에 수화기를 들고 천천히 다이얼을 찍어 눌렀다. 신호음이 갔다. 번만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님, 제임스 강입니다."

", 제임스! 오랜만이야?"

", 형님. 별고 없으셨죠?"

"물론이지. 그런데 무슨……"

상대가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일이 생겼어요."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화두를 꺼냈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봐. 이제 뗐어."

"형님! 천하의 형님같은 분이 그러십니까?"

"아니야, 이제 못해. 아니, 안해!"

"그래도 형님, 페인트 묻혀가며 어렵게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아니, 사람이?"

" 건만 해결하면 그래도 달은 편안할텐데……"

"이봐! 전화 끊자고!"

전화가 딸깍, 하고 끊어졌다. 상대는 단단히 화가 모양이었다.

 

우형진. 그는 오랫동안 계통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자로 군림해왔다. 그는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능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사람 데려오는 데는 귀신같은 존재였다. 이번 일도 그가 아니고선 감히 엄두를 없는 어려운 건수였다.

 

그는 국경을 지키는 양국의 경찰이 예상치 못한 험한 장소를 택하는 것이 주특기였다. 감시가 허술한 장소를 이용하면 성공률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장소엔 아예 감시망이 깔려있지 않은 보통이다. 허술한 경찰망의 허를 찌른다는 계산이 먹혀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감시망이 허술한 장소엔 반드시 신체적인 수고가 뒤따른다. 오랫도록 걸어야 한다거나 혹한을 이겨내야만 밀입국에 성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형진은 전화를 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소파에 앉아 한참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후 그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고개짓만으로 유혹을 떨궈버릴 있을 것처럼.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단걸음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자신의 밴트럭 문을 열고 오늘 써버린 페인트통과 낡은 칠도구들을 하나둘씩 골라내 밖으로 집어 던졌다. 다른 같으면 번이라도 쓰려고 나뒀겠지만 오늘은 왠지 조금이라도 낡아버린 것은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주차장 구석 창고로 갔다. 내일 사용할 도구들을 빠르게 챙기기 시작했다. 흰색 페인트 , 막대붓 , 그밖의 칠감용 도구들을 한아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페인트 도구들을 차례대로 밴트럭에 싣고 가지런히 정리했다. 바깥으로 집어던졌던 껍데기와 낡은 칠도구들을 일일이 주워서 쓰레기 통에 버렸다.

 

내일 나갈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내일도 역시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그가 다시 아파트로 돌아온 시간은 반시간쯤 뒤였다. 아파트 문을 따고 들어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단걸음에 뛰어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마치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리던 사람처럼. 그러나 그는 수화기를 들고만 있을 말을 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형님, 접니다."

"……"

 

그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 형님, 말씀 잠깐만 들어보세요!"

반응이 없는 수화기에 대고 제임스는 혼자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쪽 사정이 딱하게 됐어요."

누구나 그렇듯이 사정은 본래 다들 딱하기 마련이었다. 사실 딱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형진이 같은 밀입국 전문가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제임스가 형진에게 일을 맡겨올 때마다 첫마디는 언제나 의뢰인의 처지가 불쌍하다는 거였다. 레퍼토리는 언제나 같았다.

 

"어린아이가 죽어가고 있어요!"

어린아이란 말에 형진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지금 살아있다면 자신의 아들은 이제 네살이 되었을 것이다.

" 여자가 이혼을 하면서 남편에게 일곱살박이 아들 아이 하나를 남겨뒀는데, 글쎄 얘가 계모 밑에서 폭행을 당하고 있다잖아요."

제임스는 형진이 듣거나말거나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형진은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서도 숨을 죽이고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형님 텔레비전 같은 데서 못봤어요? 요즘 한국에 학대받고 사는 애들이 그렇게나 많다네요."

그래도 형진쪽에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답답해진 제임스는 수화기에 대고 형진을 불러댔다.

"듣고 있수, 형님? 여보세요! 여보세요……"

"제임스……"

", 형님!"

형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 이미 일은 씻었어. 그리고 지금 다시 한다해도 이젠 제대로 해낼 자신도 없어."

"아니예요, 형님. 형님은 충분히 있어요!"

"……"

"사람 하나 살리는 치고 도와주세요, ?"

 

형진은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였다. 그러자 제임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형진은 대개의 경우 이렇게 뜸을 들이다 반드시 오케이 사인을 보내오는 인물임을 제임스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하는 사람들이 씻었다며 빼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형진의 경우는 달랐다. 형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스터 ! 정말 안되겠어."

"형님, ……"

" 있어."

우형진 쪽에서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낭패였다. 그럼 이번 일은 포기해야만 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굵직한 건수를 놓치게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제임스는 책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같이 단속이 심한 때는 있으면 자제해야겠지만 그래도 목돈이 생기는 일인만큼 목숨을 걸고서라도 하고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제임스는 금전의 유혹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다.

 

한편 우형진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내심 후회했다.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질책했다. 마음잡고 착실하게 살아보려는 사람을 자꾸 끌어들이려 하느냐, 욕설이라도 한마디 퍼부었어야 옳았다. 그것은 알고보면 상대방에게 하는 욕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자기 스스로에게 맘을 먹지 않도록 쐐기를 박는 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형진은 자신이 돈에 약해지고 인정에 약해지는 성격이란 것을 확인할 때마다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사실 이런 자신의 성격 때문에 불가능한 무리수를 던져가며 어쩔 없이 손을 건수만도 십여 건이 넘는다. 그때마다 줄곧 후회하곤 했지만 성공을 거두고 뒤에 오는 보람은 남다른 충만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마치 자신이 구세주라도 기분을 만끽했었다.

 

형진은 어두컴컴한 거실 소파에 앉아 한참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긴박감을 더해가고 있었다.

 

잠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걸어들어갔다. 침실 벽에 붙어있는 벽장 문을 열었다. 벽장 위칸 깊숙한 곳에 여행용 손가방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형진은 까치발을 하고 가방을 살며시 내렸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손바닥으로 먼지를 쓰윽 쓸어내렸다.

 

비밀번호를 돌리자 가방이 딸깍, 하며 순순히 열렸다. 비밀번호를 생각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려 2년동안 쓰지 않았지만 그때까지는 줄곧 가방과 함께 살다시피했다.

 

가방 안에는 몇가지 도구들이 있었다. 그는 하나를 집어들었다. 군용 대검이었다.

 

형진은 칼집에 붙어있는 똑딱단추를 조심스럽게 따고는 대검을 쑤욱 뽑아들었다. 날이 시퍼런 대검이 오랜 수면을 마치고 세상구경을 하자 엷은 달빛에도 번쩍 섬광이 비췄다.

 

그는 일이 없는 때엔 매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그리피스팍 뒷산에 올라 체력단련에 열중했었다. 그는 참기 어려운 긴장감을 삭이기 위해선 건강한 신체가 최고라고 믿었다.

 

그가 어둠이 깔린 꼭두새벽에 산에 오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현장의 조건과 유사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운동을 때마다 왼쪽 허벅지엔 항상 날이 시퍼렇게 대검을 차고 있었다. 물론 죽음을 불사한다는 결연한 각오를 표현하는 상징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는 현장에는 대검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대검이 발각될 경우 자신에게 유리할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형진은 대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지난 일이 떠올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2년전 캐나다 중부 국경은 폭설이 내려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외국이라고는 캐나다가 처음인 이십대 중반의 유부녀와 동행했다. 그녀는 연락이 두절된 남편을 찾아 어렵게 미국행을 결심한 어린 신부였다.

 

그들 부부는 결혼한지 석달만에 헤어져서는 3 동안이나 떨어져 살았다고 한다. 겨우 전세칸을 마련해 신혼살림을 꾸린 이들 부부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미국 이민을 계획했다. 그러던차에 방법을 찾지 못하자 남자가 먼저 위장결혼으로 미국 영주권을 받은 여자를 초청하는 위험한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이들은 서류상으로 이혼을 하고 남자는 먼저 미국 시민권자와 재혼하는 형태로 미국땅에 발을 딛게된다.

 

그런데 꼬박 편지와 전화를 번갈아가며 사랑을 확인하던 남자가 일년 전부터 연락이 두절되고 전에 보내온 편지에는 행복하게 살라는 한마디의 이별선언이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온갖 방법으로 남편을 수소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여자는 직접 미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하나 3년전 남자의 사랑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확인해야겠다는 어리석은 미련 때문에 여자는 위험을 감수하고 남편을 찾아 떠나기로 것이다.

 

그러나 몇번에 걸쳐 비자에서부터 고배를 마시게 여자는 급기야 이민브로커를 찾게 되었고 결국 형진을 만나게 된다.

 

겨울 캐나다에는 50년만에 가장 심한 폭설이 내렸다. 눈이 그치기를 기다리느라 캐나다 땅에서 이틀 동안 꼬박 발이 묶여 있었다. 다행히 사흘만에 눈이 그치고 입국을 시도했지만 예상 외로 국경의 경비망이 삼엄했다.

 

까지만 해도 바닥에선 내노라하는 실력자로 군림하던 우형진은 삼십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기운으로 두려움을 모르던 때였다. 주택가로 연결된 국경을 택하면 훨씬 수월했겠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육체적 고통이 따르긴해도 굳이 야산이나 강변 같은 오지만을 골라 밀입국을 시도해왔다.

 

주택가로 연결된 국경 부근의 주민들은 어떻게든 나라 경찰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때문에 주민 외의 낯선 이방인이 나타나면 신고가 들어가고 발각될 확률도 상대적으로 높다. 대신에 이쪽 통로는 신체적인 위험은 없었다. 경찰의 조사를 받더라도 관광객 행세를 하게 되면 빠져나올 구멍도 많았다.

 

악몽의 , 캐나다 국민의 시선이 온통 폭설에 집중돼 있는 사이 경비망은 오히려 허술해지리라 생각했던 형진의 생각이 결정적인 판단착오를 가져왔다.

 

여자는 추위에 두려움까지 겹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거예요.!"

"......"

"! 이제 갑시다!"

 

거사를 단행할 장소는 캐나다 중남부 민스톤시 인근 야산이었다. 여기서 미국 중북부 플렌티우드시로 넘어가면 가까이 94 고속국도가 있어 미국내 동서부 어디로든 이동하기 수월했다.

 

걸어야 거리는 반마일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평소 경찰의 감시망이 허술한 지역으로 국경을 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형진은 고생스럽더라도 이곳을 이용했다.

 

"! 여기, 이쪽으로 와요!"

형진이 쉴새없이 그녀를 재촉했다. 여자는 한겨울 눈쌓인 산길에 익숙치 못해 마냥 뒤쳐지고 있었다. 형진을 바싹 따라붙으려고 애를 쓰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간간이 삭풍에 못이겨 눈보라가 휘몰아치곤 했다. 때마다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낮은 비명을 지르며 형진의 뒤를 따랐다.

 

사람은 야산을 타고 넘어 산기슭 아랫자락에 이르렀다. 그들의 앞으로 허허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땅바닥은 혹한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제 벌판만 통과하면 미국땅이다. 거리는 불과 30피트 남짓했다. 그곳만 통과하면 그들은 미국땅을 밟게 된다.

 

형진이 먼저 주위를 살피고 벌판으로 발짝씩 나아갔다. 그녀가 조심조심 형진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불과 발짝도 전진하지 않았을 때였다.

 

저쪽 건너편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빨간 조명탄이 하늘로 치솟았다. 동시에 사방에서 서치라이트가 번쩍 켜지며 길을 훤하게 밝혔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15 미국생활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형진이 외마디를 지르며 달아났다.

"뛰어!"

 

형진은 반대편 속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얼마쯤이나 뛰었을까. 따라오는 경찰병력의 발걸음 소리가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까지 뛰어가서야 뒤를 돌아봤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고목나무 사이로 조명탄의 붉은 빛이 정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형진은 급한대로 눈이 수북히 쌓인 커다란 바위 뒤에 납작 엎드렸다. 귀만 쫑긋 세우고 신경을 집중시켰다. 시간 동안 그렇게 낮은포복 자세로 숨을 죽이고 버텼다. 그의 체온에 눈이 녹아 두꺼운 파커점퍼 속까지 스며들어 온몸이 축축해졌다. 이젠 저쪽 벌판쪽에도 인기척이 잦아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고 벌판쪽이 보이는 곳까지 조금씩 이동해갔다. 십여 미터를 이동하자 벌판쪽이 보였다. 경찰의 대오가 눈에 들어왔다. 캐나다 국경 경찰이었다. 그의 눈은 경찰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중에도 쉴새없이 여자를 찾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작은 지휘차량과 다인승 승합차가 일렬로 있었다. 차량의 미등이 빨갛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시동이 걸려있는 승합차 배기구에서는 연기와 김이 뒤엉켜 짙은 회색의 배기가스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경찰들이 빠르게 트럭에 오르고 있었다. 철수를 위해 대오를 정비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차들이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형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론 끌려가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선해 괴로웠다. 못할 짓이었다.

 

사건이 있은 형진은 아내를 잃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상에 태어날 자신의 아이도 함께 잃었다. 임신 3개월째인 그의 아내는 그를 오지로 보내고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오래전부터 브로커 일을 한사코 만류하던 그의 아내는 그가 캐나다로 떠난 보름 사이에 3개월된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고 충격에 정신을 잃고 어디론가 잠적해버렸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고 뒤였다. 그는 후회막심했다. 항상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결심을 거듭했지만 언제나 그렇게 마지못해 끌려다니며 10년을 훌쩍 넘겼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자신의 모든 잃고 뒤에 후회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악몽과도 같던 지난 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그는 온몸을 심하게 떨었다. 들고 있던 대검을 가방 위에 집어던졌다. 머리를 좌우로 심하게 털었다. 이젠 정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시금 굳게 결심해본다.

 

다음날 새벽 형진은 밴트럭을 몰고 페인트 일을 하는 글렌데일로 향했다. 트럭이 우당탕탕 심하게 떨리며 다분히 고물차 티를 냈다. 차의 요동과 함께 짐칸에 실은 페인트 도구들이 덩달아 춤을 추듯 요란한 소음을 냈다. 마치 트럭 바닥을 악기로 삼아 빠른 힘합송을 연주하듯 요란스러웠다.

 

10 지각했다. 같이 일하는 히스패닉계 일꾼들은 벌써 나와 장비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들은 페인트를 색깔별로 배합하고 칠도구들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형진이 차에서 내리는데 사장이 안쪽에서 나오다 그를 발견했다.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일분의 지각도 허용하지 않는다.

"미스터 !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

"……"

"쯧쯧…… 사람 말귀를 알아들어."

그는 가재눈을 뜨고 형진을 힐끗 흘겨보더니 저쪽 다른 일꾼들에게로 걸어갔다. 분명 잔소리를 늘어놓을 뻔했다. 잔소리는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이젠 모두들 아예 그러려니 정도였다.

 

가닥 남지 않은 그의 백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볼록 나온 똥배를 이끌고 다니며 특유의 종종걸음 행진이 시작됐다. 그는 언제나 작업 내내 일터 여기저기를 오가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조용할 불안했다.

 

그는 페인트로 어렵게 성공한 인물이었다. 처음엔 부인과 둘이 회사의 하청을 받아 일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자리가 잡히게 되자 자기는 관리만 하고 페인트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그래도 매달 집으로 들고 가는 돈은 액수라고 한다.

 

우선 노임으로 히스패닉계 노동자를 쓰기 때문에 일단 인건비는 이하로 줄일 있었다. 한국사람을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형진은 숙련공이고 노임을 히스패닉계 보다 조금 얹어주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그리고 현재 일감을 따내 공사에 들어간 주택만 다섯채나 된다. 전체 인부 숫자가 보통 스물너댓 정도 된다. 그는 개인 페인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 치고는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형진은 오늘 아침부터 일이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페인트를 배합하려 해도 색이 나오지 않았다. 번이고 색깔이 다른 페인트를 번갈아가며 섞어봤지만 헛수고였다.

 

아니다. 벽에 페인트도 먹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며칠도 버티지 못하고 칠이 갈라지거나 벗겨질 뻔했다. 도료와 첨가제의 비율이 제대로 맞은 때문이었다. 분명 평소 하던대로 했는데도 오늘따라 요상스러웠다.

페인트일 2 동안 이런 일이 별로 없었다. 초보때는 좋게도 일일이 꼼꼼하게 가르쳐주는 아주 친절한 사장을 만나 수월하게 배웠다.

 

오늘 같은 경우에 사장이 봤다면 물론 마디 하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사장이 보지 못하고 있었다. 사장은 이곳이 일터이기 때문에 며칠사이 대부분 여기서 시간을 보냈다. 집이 크긴 컸다. 2백만불 짜리 집이라고 했으니 웬만큼 규모를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어찌됐든 일단은 그런대로 본래의 색깔을 만들어 칠하기 시작했다. 건조상태도 괜찮을 것으로 보였다.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드디어 것이 오고야 말았다. 형진이 맡아 칠한 부분을 사장이 둘러보더니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항상 있던 일이지만 오늘따라 형진은 사장의 잔소리에 거부반응이 일었다.

 

"이거 마르고 나면 벗겨질 뻔한데?"

"? 생각엔 괜찮을 같은데요."

"그건 당신 생각이고. 어디 하루이틀 장사해?"

"……"

"이거 닦아내고 다시 !"

"……"

 

형진은 마지못해 대답을 하긴 했지만 오늘 만큼은 이상하게도 사장의 잔소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는 헝겊에 물을 축축하게 적셔 들고 칠한 부분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칠한 부분은 마르고 있는 상태라서 쉽게 닦이지 않았다.

 

부지런히 닦아내고는 바짝 마르길 기다렸다가 샌드페이퍼로 벽을 문질렀다. 번을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형진은 그렇게 번이고 페인트를 갈아내려 하다말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꼈다.

 

형진은 헝겊뭉치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를 모금 깊게 들이 마시고 양껏 내뿜었다. 그러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담배로나마 안정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였다.

 

형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 차를 세워둔 주차장 쪽으로 갔다. 시동을 걸었다. 차를 돌려 나오려는데 사장이 뒤에서 그를 손짓해 불렀다. 그러나 그는 모른 그냥 앞으로 차를 몰아 나갔다.

 

형진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마음을 진정시킬 없었다. 그는 그다지 다혈질적인 성격도 아니건만 오늘따라 유난히 자기통제가 안되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작업복을 입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찍어눌렀다.

", 제임스 강입니다."

"……"

"여보세요!"

형진의 입에서 쉽사리 말문이 터지지 않았다.

"혹시……"

"그래 나야."

", 형님!"

"……"

"결정하셨군요?"

"……"

"그럼 지금 사무실로 나오세요. 기다릴게요!"

 

형진은 대답은 하지 않고 잠시 전화를 끊었다. 침실쪽으로 걸어가 벽장 문을 열어 가방을 꺼냈다. 가방 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대검을 꺼내 들여다 보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형진이 유학원 사무실에 나타난 시간은 퇴근시간이 지난 저녁 때였다. 때까지도 제임스는 형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은 거의 2년만에 만났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회의는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방면에 이미 이골이 사람들답게 구구절절한 얘기가 필요치 않았다. 제임스는 형진에게 캐나다에서의 약속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자에 관한 정보를 알려줬다. 나머지 밀입국 방법은 전적으로 형진의 몫이다.

 

그리고 약속한 일주일이 흘렀다.

형진은 아이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찾아갔다. 아이는 캐나다 업자와 함께 있었다.

캐나다 업자에게 아이를 넘겨 받았다. 형진은 속주머니에서 하얀 편지봉투를 꺼내 그에게 건네줬다. 출발할 제임스에게 받은 캐나다 쪽의 몫이었다. 그리곤 업자가 먼저 호텔을 떠났다.

 

아이는 생각보다 어려보였다. 일곱살이라지만 아이는 자기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맞고 자란 같지 않게 얼굴은 밝은 편이었다. 아이는 품에 조그만한 토끼를 안고 있었다.

 

"안녕?"

형진이 먼저 인사를 하자 아이는 토끼를 품에 바짝 안으며 그의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 봤다. 아이의 얼굴에 얼핏 그늘진 구석이 엿보였다.

 

"이름이 뭐니?"

"……"

아이는 형진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저씨가 이름을 알아야 한단다. 이름이 뭐지?"

아이가 뭔가 한참동안 생각하는 하다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형진은 아이의 말문이 열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진상우."

", 그러니? 이름이 상우구나?"

"……"

"내일 아저씨하고 같이 어딜 가야되겠다."

형진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얘기를 꺼냈다. 얼굴엔 미소를 듬뿍 머금고 있었다.

 

" 토끼는 어디서 거니?"

"……"

"괜찮아. 아저씨도 토끼 좋아해. 정말이야."

아이의 경계심은 쉽사리 풀릴 같지 않았다.

 

"아까 아저씨가 사줬구나?"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우선 밥부터 먹어야겠다. 배고프지?"

 

먹자는 소리에 아이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캐나다 업자가 아이를 굶겼을 리는 없을테고, 그렇다면 본래 아이에게는 밥이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형진은 마음이 씁쓸했다.

 

형진은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아이는 자기 앞에 놓여진 스테이크를 잠깐새 깔끔하게 먹어치우고 형진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최소한 먹을 때만큼은 토끼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보였다. 그렇게 애지중지 껴안고 있던 토끼를 작은 상자에 넣어 옆의 의자에 올려놓았다.

 

형진이 칼질을 하다말고 그런 아이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먹을래?"

"……"

아이는 대답은 없었지만 간절히 원하는 표정이었다. 형진은 아이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자기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 절반을 잘라 아이의 접시로 옮겨줬다. 아이는 얼른 포크를 집더니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이제 배부르니?"

아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만족스러워 보였다. 먹는 동안 방치해뒀던 토끼를 상자에서 꺼내 다시 끌어안는 아이의 행동은 이제 뱃속이 그득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형진도 나름대로 아이가 가엾기도 했지만 먹이다가는 탈이 같아 먹겠다 해도 그가 나서서 말릴 생각이었다. 배탈이 나거나 몸이 아프면 내일 일이 곤란해지질 뻔하기 때문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호텔로 돌아온 시간은 저녁 8 무렵이었다. 호텔로 돌아와보니 별달리 일이 없었다. 형진은 텔레비전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이내 꺼버렸다. 그리고는 아이가 너무 조용해 힐끔 쳐다봤다.

 

아이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토끼를 카펫바닥에 내려놓고 달리기 훈련이라도 시키고 있는 했다. 가만히 앉아있는 토끼의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쳐서 놀래켰다. 때마다 토끼는 자지러질 듯이 달아나곤 했다. 그러면 아이는 토끼를 냉큼 좇아가서 잡아채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아이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토끼를 애지중지 아끼던 아이가 그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의외였다. 역시 어린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나이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계속 장난을 하며 즐거워했다. 아이의 얼굴에서 그늘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형진은 그런 아이를 그냥 내버려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가판대에서 사들고 석간을 펼쳐 읽어 내려갔다.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고등학교 이민 덕분에 어느 정도는 읽고 쓰고 말할 줄은 알았다.

 

한시간 흘렀을까. 형진이 40면이 넘는 두꺼운 신문을 대충 넘겨갈 즈음에 문득 아이가 생각나 고개를 돌려봤다. 아이는 카펫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몸을 잔뜩 오그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토끼는 아이와 멀리 떨어져 반대편 구석에서 눈을 말똥말똥 경계태세로 쪼그려 앉아있었다. 아이에게 시달렸던 터라 토끼는 많이 지쳐 보였다.

 

형진은 아이를 번쩍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일곱살짜리의 몸이 생각보다는 굉장히 가벼웠다. 형진은 아이만 그런 건지 아니면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그런 건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었다.

 

침대에서 곤히 잠을 자던 아이가 무슨 꿈을 꿨는지 잠꼬대를 했다.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있었다.

"상미야……"

 

형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상미? 상미가 누구지?'

상미라면 아이의 이름하고 비슷한데 혹시 아이의 형제가 아닐까, 하고 형진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단지 상미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아이의 누나나 여동생일 거라고 추측만 해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제임스가 들려준 얘기로는 아이에겐 형제가 있을 없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낳고는 바로 이혼을 했다고 들었다.

 

'혹시 아이의 배다른 형제가 아닐까?'

형진은 이리저리 생각해보다 말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자기 문제도 아닌데 심각하게 고민에 빠진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아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형진은 다시 텔레비전 리모트컨트롤의 파워스위치를 눌렀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톱뉴스는 역시 국경지역의 밀입국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고 있다는 보도였다.

 

앵커는 최근 국경에서의 밀입국이 빈번해 양국 경찰력이 대폭 강화되었다고 떠들어대고 있었다. 화면에는 미국 동부에 이르는 접경지인 캐나다 퀘벡시 인근 도시 워번시의 주택가가 비춰지고 있었다. 이곳은 동부로 이르는 밀입국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주민들이 몰려나와 구경하고 있었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국인 남녀 쌍과 그들을 안내하던 남자 하나가 캐나다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앞에는 미국 경찰들도 보였다. 미처 넘어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발각되었기 때문에 캐나다 경찰의 소관이었다.

 

형진은 텔레비전에 바싹 다가가 뉴스를 지켜봤다. 그이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그는 주택가를 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생스럽더라도 감시가 소홀한 야산 지역을 골라뒀기 때문이다.

 

형진이 텔레비전을 끄고 자기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안전한 지역이라 해도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철없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다는 보통 부담을 주는 아니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봤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과연 아이를 데리고 무사히 입국할 있을지 그는 막막하기만 했다. 게다가 지금은 겨울철이라 2년전의 악몽이 그대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아침, 형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있었다. 눈이 떠지지 않아 정신만 살짝 깨어있는 상태에서 가면을 취했다.

 

형진의 귀에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눈이 번쩍 떠졌다. 형진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이의 침대를 돌아다 봤다. 아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부자리가 아주 단정하게 정리돼 있었다. 덮고 자던 얇은 시트가 차곡차곡 개켜져 있었다. 일곱살박이 어린 아이가 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이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는 어리광과 함께 불완전한 어른스러움이 아이에겐 있었다. 눈치밥을 얻어 먹으며 터득한 규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봤다. 아이가 토끼를 안고 울고 있었다. 조그만 아이의 품에 안겨있는 토끼는 결코 작아보이지 만은 않았다. 그런데 토끼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형진이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니?"

"흑흑."

아이는 대답없이 울기만 하다가 품에 안은 토끼의 몸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형진이 토끼를 빼앗으려 하자 아이가 크게 소리를 울었다. 형진이 토끼를 빼앗아 들었다. 토끼는 이미 뻣뻣하게 굳은 늘어져 있었다. 숨이 끊어졌다.

그는 길거리에서 싸게 동물이 이런 환경에선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아이에겐 충격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어제 그렇게 못살게 굴기까지 했으니 아이의 죄책감은 더욱 것이다.

 

"괜찮아. 본래부터 몸이 약한 토끼였을 거야."

"흑흑."

" 잘못이 아니야. ! 이제 그만 울고 빨리 나갈 준비나 하자!"

그가 아이를 독촉했지만 아이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그치겠거니 하고 형진은 외출 준비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형진이 15분만에 세면을 끝내고 욕실에서 나왔지만 아이는 여전히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흐느끼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 임마!"

형진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이는 자리에서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 몹시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공포감에 젖은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부드럽게 대해주던 아저씨가 갑자기 돌변했기 때문이었다.

 

형진은 한편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지만 이왕 내친김에 여세를 몰아 아이의 손에서 토끼를 빼앗으려 했다. 그런데 아이는 와중에도 토끼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역부족이었다.

 

형진이 다시 아이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 그럼 어차피 죽은 거니깐 하늘나라로 있게 우리가 묻어주자, ?"

"……"

"저기 산에다 묻어주고 하느님한테 기도 드리자, 알았지?"

 

아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역시 토끼를 놓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였다.

", 그냥 나가자. 대신에 울면 안돼, 알았어?"

 

그제서야 아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조그만 상자에 죽은 토끼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화장대에서 티슈 몇장을 뽑더니 토끼 위에 덮었다. 마지막으로 뚜껑을 닫고 아이의 외출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러는 중에도 아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형진은 아이를 데리고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형진은 택시기사에게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민스톤시 인근 마을의 지명을 댔다.

 

택시가 도심을 빠져나가 점점 인가가 드문 곳으로 달렸다. 반시간쯤 달리더니 차는 가구가 살지 않는 조그만 마을에서 멈췄고 형진과 아이가 차에서 내렸다. 그들 앞에는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깎은 듯이 뾰죽뾰죽한 야산이 펼쳐져 있었다. 산만 넘으면 바로 미국땅으로 들어갈 있었다.

 

형진이 아이의 손을 잡고 산쪽으로 걸어갔다. 산중에는 군데군데 하얀 눈꽃이 피어있었다. 두텁게 껴입은 때문에 몸이 둔해보였다. 날씨는 추웠지만 한걸음씩 산을 오를 때마다 온몸의 땀구멍에 땀방울이 맺혀 간질간질했다.

 

중턱쯤 올라갔을 형진이 마른 바위 위에 걸터 앉아 숨을 골랐다. 아이에게도 옆자리를 내주고 앉게 했다. 아이는 여전히 토끼 상자를 보물 다루듯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잠시 뒤에 형진이 일어나 끝이 뾰족한 나뭇가지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올라오면서 구해온 것이다. 눈이 녹아 질퍽한 땅은 손쉽게 파졌고 나무로 긁자 토끼가 들어갈 만한 구덩이가 금방 만들어졌다.

 

형진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토끼집을 형진에게 건네줬다. 형진은 상자를 열고 토끼를 꺼냈다. 먼저 티슈 서너장을 바닥에 깔고 위에 뻣뻣해진 토끼를 반듯하게 놓았다. 다시 티슈 장을 위에 얹고 흙을 밀어넣을 때였다. 아이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형진은 이번엔 아이를 그냥 내버려뒀다. 실컷 울어야 빨리 잊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무덤 위에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 꼽았다.

울고 있는 아이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상미야!"

형진은 눈이 동그래졌다. 어제 아이가 잠꼬대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 토끼 이름이 상미였니?"

"."

" 진짜로 동생 있니?"

"."

 

아이에게 동생이 있다면 배다른 동생일 것이다. 제임스에게서 들은 정보로는 아이의 엄마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했었다.

"상미한테 무슨 있니?"

"아뇨. 그냥 보고싶어요."

 

아마도 새엄마가 낳은 아이라면 아이처럼 학대를 받았을리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여동생을 보고싶어했다. 모르긴 해도 아이들끼리는 사이좋게 지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는 속에서 까지 동생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던 건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아이가 제대로 있을 , 그리고 부모들은 정말 자기 자식을 이렇게 만들 있는 가슴 한편이 씁쓸해졌다.

 

"! 이제 가자! 엄마한테로."

 

아이가 언제 눈물을 보였냐는 듯 씨익 웃었다. 그리곤 사뿐사뿐 내 뒤를 따라 산을 넘기 시작했다. 아이의 밝은 모습이 새로운 땅에서, 그리고 자기를 낳아준 엄마 품에서 더욱 밝아졌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 by KJ (20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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