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WRITERJANG

소박한 글쓰기

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8회> - 경찰청으로 복귀한 동찬의 첫 출근

writerjang 2023. 1. 8. 00:45

  같은 시각, 5호선 마포 지하철역 앞.

  청바지와 면티, 그리고 오리털 파카 차림의 30대 초반의 사내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와 느긋하게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엔 노트북 컴퓨터가 하나 달랑 들려 있었다.

 

  이제 3 1. 이쯤 됐으면 날씨가 따뜻한 게 정상이 아닌가. 어제 공항을 빠져나올 땐 그래도 봄기운이 완연했는데 오늘은 추위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서초동 원룸 오피스텔을 나와 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지하의 푸근한 온기에 잠깐 녹는가 싶더니 마포역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오자 냉기가 엄습했다.

 

  정오가 넘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도로 양편엔 눈이 쌓여 있었다. 곳곳에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지 인도를 걷는 행인들은 곡예를 하듯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팔을 젓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그가 전철역 입구를 지나 대각선 방향으로 경찰청 정문이 보이는 코너를 막 돌아서는 순간 저쪽 앞에서 소년 하나가 급박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손엔 여성용 핸드백을 움켜쥔 채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었다. 소매치기?

 

  순간, 그의 발이 자기도 모르게 도망자를 향해 반사적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무릎이 반쯤 펴졌을 때였다. 그의 발이 목표물을 포기하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신속하게 되돌아왔다. 아주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점퍼 차림의 사내 두 명이 그 뒤를 바싹 쫓고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언제가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도 시내 경찰서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고개를 돌려 그들의 추격전을 지켜봤다. 소년이 지하철역 입구로 사라지고 낯익은 얼굴들이 뒤따라 사라질 때까지.

  '요즘이 소매치기 특별단속기간이라 했던가? 그런데도 여전히......'

 

  선량한 시민들도 경찰청 앞을 지날 땐 왠지 주눅이 드는데, 하물며 불과 오십미터 거리도 안되는 지점에서 소매치기가 빈발할 정도면 요즘 세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해외연수를 다녀온 사이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IMF시대'라는 말이 세상에 고개를 내밀 때 쯤 연수길에 올라 만 2년만에 돌아왔다. 그 만큼 살기가 어렵고, 세상이 어수선하다는 얘기 같아서 마음 한편이 씁쓰름했다.

 

  경찰청 주변을 전경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대학생 시위가 한창인 시절에 생겨난 자체 방어벽이 세월이 변한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정문엔 의경들이 보초근무를 서고 있었다.

 

  얼마만에 와보는 건가. 출입을 삼가라더니 오늘은 어쩐 일로 직접 나오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문에 다다르자 보초를 서던 전경이 손을 들어 길을 막았다. 형사국에 볼 일이 있다고 말했지만 무슨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누굴 좀 만나러 간다고 얘길 해도 의경은 미심쩍은지 위아래로 훑어 보기만 했다. 옷차림이 영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 봐도 아는 얼굴이 없었다. 그래도 전엔 전경들하고 안면이 있어 번번히 무사통과였는데........ 오늘은 신분증을 꺼내야만 하는 번거로운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동안 신분증을 써먹는 일은 기껏해야 두세 번 정도였다. 어딜가나 대부분 그냥 말로 다 통했다. 경찰임을 알리는 신분증이란게 지갑에 고스란히 있는지나 모르겠다.

 

  지갑에서 신분증을 막 꺼내려는데, 보초가 갑자기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빨리 비키라는 시늉을 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어 정문 밖을 내다보니 검정색 중형차 한 대가 기세도 당당하게 진입하고 있었다. 보초를 서던 전경은 갑자기 꼿꼿하게 차려자세를 취하더니 힘찬 구령과 함께, 사람에게 하는 건지 그냥 차에다 대고 하는 건지 분간이 안가지만 아무튼 경례를 힘껏 올려붙였다. 누군가 높은 사람인가 보라고 생각하고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정문을 통과해 몇 미터쯤 굴러가던 중형차가 끼익, 하고 정지했다. 뒷좌석 유리가 열리더니 중년의 신사가 고개를 내밀고 손짓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서경감!"

 

  갑작스런 상황에 보초를 서던 전경은 자동차 뒷좌석에서 부른 대상을 찾으려고 정문 주변을 휘 둘러보다가 이내 낯선 사내에게 시선이 와서 멈췄다. 주변엔 사람이라곤 그 사내밖에 없었다. 전경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빙긋 웃으며 전경에게 손을 한 번 들어주곤 중형차로 바삐 걸어갔다. 전경은 어안이 벙벙해져 경감......?, 경감이라고?, 하면서 같은 단어를 몇 번이고 속으로 되풀이 하고만 있었다.

 

  중형차의 신사와 사내가 악수를 하고, 뭐라고 몇 마디 말을 나누며 웃고 떠들더니 차는 먼저 가버리고 뒤에 남은 사내는 가벼운 걸음으로 청사 안으로 사라졌다.

 

  형사국 국장실.

 

  "자넨 여전하구만."

  "국장님은 더 젊어지셨는데요?"

  "이 사람, 농담도 여전해......"

  "아니, 정말이예요."

  "알았네 알았어"

  두 사람의 대화엔 웃음 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만난 김에 회포를 풀 작정인 듯 했다.

 

  "그건 그렇고 어제 도착했지?"

  ", 오전 10시쯤에 들어왔어요."

  "그래? FBI는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돌아가지?"

  "아마 국장님이 걱정하지 않아야 더 잘 돌아갈걸요!"

  "이 사람이.......? 그래, 갔던 일은 잘 됐고?"

  ", 이번에 많은 걸 배웠어요."

  "그래 잘했어. 자네가 어련할려구......."

 

  국장은 불과 몇 마디의 인사말이 오가고 난 뒤끝에 뭔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듯, 목소리 톤을 낮췄다. 분위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오전에 대충 얘기했으니까 알겠지만, 사안이 좀 급하게 됐어."

  "그 수성그룹 연구소 살인사건 말씀이시죠?"

  "그래. 박사의 죽음이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는 박사가 연구한 프로그램의 완성여부가 국가에 끼칠 영향이 아주 막대하다는 사실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원래는 특수과에서 맡아야 될 일인데, 말이 많아서 마음이 안 놓이시는지 청장님이 특별히 지시하신 일이니까 실수없도록 하고."

  "."

  "우선 관할서에서 수사하도록 조치해 놨으니까, 그 쪽하고 협조해서 빨리 처리하도록 해봐."

  "."

  "서경감은 특히 그 프로그램에 신경쓰고."

 

  동찬은 경감이란 호칭이 마치 자기를 지칭하는 게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 들렸다. 국장이 오전에 느닷없이 전화해서는 오늘부로 경감으로 승진한 걸 축하한다며, 승진선물로 아주 중대한 사건 하나를 주겠다고 통보해왔었다. 그리고 국장은 통화 말미에 좀 무거운 사건이니 전화로 다 얘기하긴 곤란하고 경찰청으로 나와서 얼굴을 보며 얘기해보자고 덧붙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작전명령은 전화로 통보했었다. 왔다갔다 할 시간이 어딨냐는 거였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자네에게 맡기려다 보니 혼선이 좀 생겨서 현장처리가 늦어졌을 거야. 현장엔 특수과 형사들을 보냈으니까 돌아오면 사체처리나 현장조사 결과를 보고할거야. 직접 들어보고 움직이라고."

  ", 알겠습니다."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이렇게 어려운 일이 떨어져서 어떡해?"

  "장장 2년 동안이나 쉬었는데요, ?"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국장에게 오히려 괜찮다는 그의 대답이 믿음직스러워 국장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뭐 특별히 지원할 일 있으면 연락하고."

  "."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면서 동찬은 국장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국장실을 떠났다. (계속)

 

포에버 21 <9회>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