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WRITERJANG

소박한 글쓰기

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5회> - 살인사건 보다 더 중요한 국책 프로그램

writerjang 2023. 1. 6. 06:00

  노반장은 언젠가는 최소한 번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마누라에게 멀쩡한 두부를 안겨줘야겠다는 생각을 늘상 하지만 좀처럼 현실은 마음 같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렇지만 아마 멀쩡한 두부를 사다주면 마누라는 또 잔소리를 늘어놓을게 분명했다. 멀쩡한 놈이나 조금 깨진거나 두부이긴 다 마찬가진데 쓸데없이 돈만 비싸게 주고 사왔다고.

 

  "아니지, 지금 쓸데없는 일로 기운 뺄 때가 아냐. 자네들은 어젯밤에 관내에서 살인사건 난 거 알고들 있나?"

  "수성그룹 연구소 박사 살인사건 말씀이시죠?"

  정나리 형사가 눈치빠르게 대답했다. 역시 그녀의 눈치 하나는 천부적으로 타고 난 것인가 보다.

 

  "그래. 그런데 문제는 박사도 박사지만 그가 연구했던 프로그램 칩인가 뭔가가 문제라나?"

  서장이 뭐라고 말하긴 했는데, 아까는 워낙 정신을 빼앗겨서 그랬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아 낯선 영어단어만 입안에서 맴돌았다.

 

  "상황일지를 보니까 피살자는 정일준 박사고, 수성그룹 통신프로그램 연구개발팀 팀장이며, 야근중에 연구실에서 피살되었다고 적혀있더군요." 

  이번에도 역시 정형사가 말을 거들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느새 상황일지를 들고왔는지 그 부분이 기록된 면을 펼친 채로 반장에게 슬쩍 들이 밀었다. 역시 센스 만점이었다. 이래서 반장에겐 그녀가 가장 맘에 쏙 드는 부하직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커피를 타주는 서비스는 안할지라도.

 

  어느 부서건 여직원을 기피하는 마당에 노반장이라고 별로 다를 없었다. 일반 회사도 아니고 항상 위험이 도사리는 경찰 업무에, 특히 강력범을 다뤄야 하는 형사과에서 여직원을 배정 받는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겪고 보니 그럴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맘에 드는 짓만 골라서 하고, 또 때로는 남자들이 할 수 없는 임무도 척척 해내는 걸 보면 역시 여형사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턴지 반장에겐 강한 신념처럼 되어버렸다.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정보통신 프로그램 칩을 개발하고 있었다는 거야."

  말을 하면서 반장은 상황일지를 대충 훑어보았다. 그러다 말고 반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사건사고 송출 시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1999. 3. 1. 07:55'

 

  반장이 참을 없었던지 천장에다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막 들어온 것 가지고 그 난리를 쳤단말야!"

 

  형사들이 반장의 갑작스런 딴소리에 의아해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 뭐라구요?"

  ", 아니야 아무것도."

  반장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자기의 때문에 문제가 이상 확산되는 막으려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서장은 아무래도 경찰청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것 같았다.

 

  ", 보자...... 통신 프로그램 칩 '포에버 21'......? 뭐 그런 걸 개발중이었다는군."

 

  일지를 번이고 읽어봐도 개념이 정확하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만 빨리 현장에 파견할 수사팀을 꾸려야 한다는 당위성만 앞설 뿐이었다.

 

  "그럼, 조형사, 정형사가 먼저 현장에 나가고, 양형사는 우선 눈을 좀 붙이고 오후에 나하고 함께 움직이자고."

  "!"

  양형사가 피곤한 기색을 참으며 대답했다. 형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조형사! 현장보존 명심하고."

  "네에, 자알 알겠습니다!"

  조형사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주춤하며 반장의 말에 대답은 하면서도 속으론 '맨날 그 소리야!'하고 발끈했다.

  노반장은 형사들이 의욕적으로 뛰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경찰청에서 사람이 나오기로 되어 있다는 말을 안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괜히 사기 꺾을 일 없다, 싶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 봤다.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과장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서장한테 깨질 일을 생각하니 과장이 불쌍하다고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한 번 혼 좀 나봐야해, 하며 통쾌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다 말고 갑자기 마음 속으로나마 '깨진다'는 표현을 사용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말이 어디 하루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던가. 선배들이 썼고, 또 그 위의 선배들이 썼던 전통있는 단언데....... 아까는 괜히 심술이 나서 애꿎은 조형사만 타박했었다.

 

  반장은 언제나 조형사에게만 트집을 잡았다. 아둔해 보이는 커다란 그의 몸집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조형사는 자기의 참모역할을 하고 있는 바로 밑의 부하이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아랫사람에겐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고 늘어지기가 싫은게 반장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반장은 또 다시 시계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양반은 도대체 벌써 옷을 벗고 싶은가.......'

 

3: 현장

 

  때늦게 내린 함박눈 때문에 도로는 엉망진창이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린 탓으로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차를 끌고 나온 사람들이나 도로를 관리하는 공무원들 조차 사전에 아무런 대비가 없었고, 이 때문에 도로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교통사고가 속출하는데도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길가에 세워놓은 차량들도 점점 늘어만 갔다. 사고차량이거나 길이 미끄러워 지레 겁을 먹고 운행을 포기한 차량들이 대부분이었다. 정체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조형사와 정형사는 10시가 다 되어서야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소같으면 10분이면 충분할 것을 30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그것도 조형사의 고물차에 '경찰'이라고 쓰여진 경광등까지 부착한 채로 묘기를 부리며 달려온 결과였다.

 

  정문에는 '수성그룹 부설 연구소'라는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어있었다. 어디서 출동했는지 소속을 알 수 없는 전경들이 이미 정문을 에워싸고 출입자를 통제하고 있었다.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조형사와 정형사가 정문쪽으로 걸어가자 전경들은 몸집이 비대한 30대 중반의 남자와 미모의 20대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곤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막아서려고 했다.

 

  조형사가 재빠르게 지갑 속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이자 경계근무를 서던 전경들은 그제서야 경례를 힘껏 올려붙였다. 게다가 전경들은 사건이 발생한 연구실 쪽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안내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경의 안내에 고개를 끄덕이던 조형사가 이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던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자네들은 어디서 나온 병력인가?"

  "저희들은 연구소 경계근무를 위해 각 서에서 차출되어 나왔습니다."

  "아하 그래! 그럼 원래부터 여기서 근무를 했었다는거지?"

  ", 그렇습니다."

  "으음......."

 

  조형사는 관할서에서 늑장 출동을 했다고 윗사람들에게 욕먹는 일은 면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살인사건의 경우 현장에 늦게 출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상이변도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연구실에도 이미 출입구에서부터 전경들이 깔려있었다. 복도에는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반쯤 열려있는 문틈으로 연구실 안쪽을 넘겨다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엔 의사들이나 입는 흰색 가운을 걸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아마도 연구원들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출입구 쪽으로 걸어가면서 조형사는 유난히 목에 힘을 주었다.

  ", 길 좀 비킵시다!"

 

  무례한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보기드문 살인사건 현장을 가까이서 맞은 연구원들은 긴장된 탓인지 모두들 한마디에 오싹 움츠러들었다. 조선배는 이런데다 스트레스를 푸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정형사가 그의 뒤를 바싹 따라 걸었다.

 

  형사는 또다시 출입구 경계근무자에게 신분증을 보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현장엔 연구소 소장과 피살체를 최초로 목격한 순찰 경비원, 그리고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연구원 서너명이 사체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체는 담요로 덮어씌운 채 바닥에 그대로 널부러져 있었고, 집기들이 흐트러져 있는 것으로 봐서 현장은 아직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 같았다. (계속)

 

포에버 21 <6회>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