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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15회> -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 그리고 수사

writerjang 2023. 1. 10. 12:42

  인기척이 나자 손박사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문쪽으로 돌려 힐끗 바라보더니 낯선 인물임을 발견하자 적잖이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동찬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누구시죠?"

  손박사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 미안합니다. 경찰입니다. 손중선 박사시죠, 수석연구원으로 계시는?"

  동찬은 먼저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물론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자기가 누군가에게 노출돼 있다고 생각하면 그 상대를 쉽게 대하진 못한다는 아주 단순하지만 그럴듯한 논리였다.

 

  경찰이라고 신분을 밝힌 자가 자기 이름을 부르자 손박사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 ...... 그런데 오전에 이미 조사가 끝난 거로 알고 있는데......"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조사가 끝날 리가 있나요? 앞으로도 자주 찾아오게 될 겁니다."

 

  정도면 그냥 막무가내로 내치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고 동찬은 과감하게 프로그램 얘기까지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다시 말문을 열었다.

  "뭐 제가 도와드릴 거라도......"

  ", 잠깐 저하고 얘길 좀 나눴으면 합니다."

 

  말을 하면서 동찬은 컴퓨터가 놓여진 책상쪽으로 다가갔다. 컴퓨터는 꺼져 있었다. 작업을 포기한 건지, 잠깐 휴식을 취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곳에 컴퓨터가 꺼져 있다는 사실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주인이 없는 자리니까 꺼놓을 수도 있겠지만.

 

  "무슨 얘기를.......?"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그 바이러스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 , 프로그램 말이죠. 아직은 미지수입니다만, 분명한건 어떤 프로그램이든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대부분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정박사 혼자서 연구한게 아닌데, 손박사께서 지금부터 다시 프로그램을 짜면 안됩니까? 어차피 정박사는 마무리만 했다면서요?"

  "그게 그렇지가 않으니까 문제가 심각한 겁니다. 지금부터 새로 시작한다 해도 완성하려면 최소한 3개월 이상 걸리고, 설사 그 기간내에 끝낸다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오리란 보장이 없어요. 게다가 교수님이 분담한 파일의 경우엔 완전히 손상됐어요."

  "그러면 정부의 장기발전계획은 영영 수포로 돌아가는 겁니까?"

  동찬이 발전계획 운운하자 그는 한번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 형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하는 눈치였다.

 

  "최선을 다 해봐야겠죠."

  동찬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템포를 조금 늦추어 말을 꺼냈다.

 

  "그럼 그 프로그램을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지금은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심각하게 감염됐는지 알고싶네요."

 

  손박사가 소파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면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 실망하지 마세요."

 

 

  손박사가 컴퓨터 전원을 켰다. 하드디스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치들을 불러들이는 작업이 진행되고 윈도우 화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배경화면이 떴다. 손박사는 마우스로 내컴퓨터란 이름이 붙은 아이콘을 클릭했다. '프로젝트Ⅱ'라는 폴더를 찾아 클릭했다. 폴더 안에 있는 여러 파일 중 '포에버 21'이란 파일명이 붙은 아이콘을 클릭했다. 화면이 바뀌면서 컴퓨터가 암호를 요구했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암호를 타이핑했다. 동찬의 눈은 그의 빠른 손놀림을 따라 움직였다. 몇 번을 반복해서 머리속으로 외웠다.

  '12051963'

 

  여기까지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로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순탄하게 진행됐다. 문제의 파일을 불러들이자 에러메시지가 떴다. 몇 번 다시 시도하자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

 

  손박사가 프로그램 편집기를 실행시켜 파일을 불러들였다. 컴퓨터에 심한 잡음이 들리더니 화면에 내용물이 깔렸다. 그러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일의 곳곳이 심하게 손상됐다.

 

  ", 됐습니다. 이제 그만 하시죠."

  동찬이 손박사에게 말하며 소파로 가서 털썩 앉았다.

 

  소장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동찬을 보더니 소장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뭐라 한 마디 하려다말고 이내 포기한 듯 별 말이 없었다. 그는 동찬의 존재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그냥 손박사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는 사이 동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다 정보통신 연구팀 앞을 지날 열려진 문틈으로 실내가 얼핏 보였다. 아까 소장실 문앞에서 마주쳤던 미모의 여기자가 연구원들에게 둘러싸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자는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내일 아침엔 세상이 발칵 뒤집히겠군.'

 

**********

 

  같은 시각 조형사는 연구소 행정실을 들러 간밤의 야근자 현황에 대해 조사했다. 일단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과장을 만나 야근자 명단을 입수하고, 이들의 신원카드 복사본을 제공받았다. 지난 밤에 숙직했던 경비원을 시켜 숙직일지도 한 부 복사해 제출토록 했다. 조형사는 자료를 면밀히 살피면서 중간중간 의문나는 사항들은 행정과장과 경비원에게 물어 확인했다.

 

  조사결과 지난밤 야근자는 숙직 경비를 포함해 모두 5명이었으며, 그 중 타 연구팀 연구원 3명은 오후 9시 이전에 퇴근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보통신 연구팀 수석연구원인 손중선 박사는 새벽 15분에 퇴근했으며 경비원은 어제 오후 6시부터 계속 연구소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형사는 손박사와 경비원 두 사람을 일단 용의선상에 올리고 집중적으로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형사를 만나 청량리서로 돌아가기 위해 제3연구동 현관 앞으로 발길을 옮겼다.

 

 

6: 가족

 

  살인사건이 때마다 매번 겪는 일이지만 피살자 가족들과 만나는 보다 어려운 일은 없었다.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 보다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으며 세상의 또 무엇이 이 보다 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경찰이랍시고 그 가족을 붙잡고 죽은 사람의 과거가 어땠느니, 평소 행실은 어땠느니 하며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역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노형석 반장은 이제 이런 경우를 한두 겪어본 것도 아니지만 오늘은 왠지 공허한 마음이 앞서 피살자의 가족과 만나기 전에 드는 긴장감이 다른 날의 배나 더했다. 전도유망한 컴퓨터 공학 박사의 죽음이 아깝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치 자신이 범인이라도 된 양 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꺼려졌다.

 

  지금쯤 국과수에선 부검이 끝나고 시신이 영안실로 옮겨졌을 시간이었다. 반장은 우선 전화로 영안실을 확인한 후 양형사와 함께 가족을 방문했다.

 

  H대 병원에 마련된 영안실은 한산했다. 아직 일가 친인척에게 알리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친척들이 몰려오기엔 좀 이른 시간인지 일손이라곤 고작 아주머니 단 한 명뿐이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도 부인과 열 살짜리 아들 뿐이었고 전반적으로 조문객을 맞을 채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반장과 양형사는 우선 아쉬운대로 향을 개씩 피워 예를 갖추고 나서 상주와 맞절을 했다. 삼십대 후반의 미망인은 아무리 봐도 아직은 남편을 잃고 남은 세월을 혼자 살아가기에는 너무 젊었다. 얼굴은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지만 고생한 흔적 없이 탄력있는 피부를 가지고 있어 본래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젊어 보였다.

 

 절을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미망인이 곡을 시작했다. 나이와 외모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곡을 아주 구슬프게 잘했다. 하지만 입에서 곡이 나올 뿐 그녀의 눈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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