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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1회> - 21세기 국가 발전 계획

writerjang 2023. 1. 4. 12:19

1장: 감염

  어둠에 휩싸인 연구실 창문으로 늦겨울의 싸늘한 달빛이 부딪히고 있었다. 컴퓨터 전문 서적으로 가득 찬 책장이 사방 벽면을 에두르고 있었고, 한쪽 귀퉁이에 놓인 캐비닛엔 활짝 열린 문짝으로 갖가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CD가 어지럽게 쏟아져 나와 있었다. 캐비닛 주변은 무언가를 찾으려 했는지 뒤죽박죽 흐트러져 있었다.

 

  책상 끄트머리에 매달린 스탠드에선 흐릿한 불빛이 백열등을 흘러나와 서류철이 널부러진 책상 중심으로 모아져 두툼한 문서철 위에 머물렀다. '21세기 국가발전 계획'이라는 커다란 제목이 붙은 문서철.

 

  어지럽혀진 연구실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정일준 박사는 이제 안정을 되찾았는지 컴퓨터 자판기만 빠른 손놀림으로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의 널찍한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이미 아홉 번째로 담아 온 블랙커피가 머그잔 속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하면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다. 그것도 줄담배를……

 

  종잡을 없이 처참한 심정이었다.

  그동안 20여명의 연구원이 분야별로 역할을 맡아 연구하고 완성한 것을 종합해 최종적으로 실용성에 대한 확인까지 마친 프로그램 '포에버 21'이 이름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 무참히 짓뭉개져 있었다. 최소한 파일의 70 퍼센트 이상이 감염됐다. 이 정도면 아예 프로그램을 새로 짜야 할 형편이었다. 컴퓨터 안의 다른 파일들은 부분적으로 손상이 갔지만 그런대로 쓸만한데 유독 이것만 심하게 파괴돼 버렸다.

 

  프로그램의 완성은 이미 연구원들의 손을 떠나 그에게 넘겨졌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태가 아주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혼자서 끙끙대며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누굴까? 누가 감히 이런 몹쓸 짓을......'

 

  정부의 21세기 국가발전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정보통신산업 육성책에 따라 수성그룹은 일찌감치 사내에 특별 연구소를 설치하고 통신시스템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해왔다. 컴퓨터공학 계통의 실력있는 석박사는 물론, 정보통신 업계의 두뇌들까지 불러모아 '통신프로그램 연구개발팀'을 구성했다.

 

  연구팀은 특히 차세대 통신기기 산업을 주도할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프로그램 개발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른바 '포에버 21'이라 명명된 프로그램 칩.

 

  수성그룹은 통신산업을 주요 업종으로 성장, 재계 서열 상위권에 이른 굴지의 대기업. 통신 분야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최근 신제품을 속속 발표해 화제를 몰고온 기업이었다.

 

  수성은 정부의 통신산업 육성 계획을 미리 감지하고는 무려 3년 동안 프로그램 칩 개발에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비단 수성그룹만이 아니었다. 이 분야는 21세기 최고의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잠재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산업이므로 이익을 노리고 달려드는 기업 또한 부지기수였다.

 

  그러던 새해 벽두에 발표된 정부의 공식적인 육성지원책에 따라 재계는 치열한 경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가고 있었다.

 

  그러나 통신업계의 선두주자는 역시 수성그룹이었다. 수성은 통신산업 단일 업종만으로는 언제나 일위 자리를 고수해왔다. 세계에서도 선두다툼을 할 정도로 수성은 통신분야에서 강세를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같은 업종의 기업들은 수성을 부러워했지만 반면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수성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단시일내에 완성시키기엔 무리가 따르는 작업임엔 틀림없었다.

 

  수성은 작년말까지 프로그램 개발을 완료하고 올해 초부터 현장 실험을 거쳐 본격적인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에 돌입할 계획이었다. 20여명의 연구원들이 사생활까지도 포기하고 3년 내내 프로그램 개발에만 매달렸음에도 불구, 계획된 일정을 넘기고 새해가 돼서야 겨우 결론이 나올 정도로 힘겨운 작업의 연속이었다.

 

  정일준박사가 연구개발팀장이었다. 그는 그동안 연구원 각자가 분담해 연구한 내용을 토대로 어제 프로젝트를 완성시켰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기 전에, 더욱이 복사본 한 장 받아놓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마는 불상사가 생겼다.

 

  '바이러스 성분으로 봐선 누군가 고의적으로 이 프로그램만을 노리고 침투시킨 게 분명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가며 감염된 프로그램을 복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와중에도 그의 머리는 계속 바이러스를 침투시킨 해커를 찾아내려는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혹시 권박사가?'

  언뜻 그의 뇌리엔 권남우 박사가 떠올랐다. 권박사는 그의 연구결과를 가장 궁금해 한 인물이었다. 그는 틈만나면 정박사에게 연구성과에 대해 물어오곤 했다.

 

 

  태산그룹 컴퓨터시스템 연구소장인 그에게도 그룹 차원에서 통신프로그램 개발 지시가 떨어진 이미 오래였다.

 

  업계 순위에서 수성그룹 보다 상위에 있는 태산그룹은 유독 통신산업만 현격하게 뒤쳐져 있어 항상 불만이었다. 태산의 입장에서 수성은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태산은 이번 기회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통신분야에서도 수성 보다 앞서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나 태산은 사실 외형만 수성 보다 내실은 없었다. 태산그룹은 신흥재벌의 취약구조 때문에 경제 전반의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최근 심각한 적자와 부도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태산은 이번 통신산업 육성책이 어쩌면 재도약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있었다.

 

  '아니야 그 친구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냐.'

  정박사는 권박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비록 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기업의 속물적 풍토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학자다운 기풍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권남우 박사라고 믿었다.

 

  정일준 박사는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무려 10년 넘게 대학을 다녔고, 졸업한 뒤에도 계속 사회생활을 해왔지만 권박사 말고는 친구다운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호방한 성격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인물들은 많은 편이었지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진정한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권박사와는 더욱 친밀할 수밖에 없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형제보다도 더 가까웠다.

 

  그러나 순간 정박사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는 옛말이 떠올랐다.

 

  온갖 수단을 써봐도 복구되지 않는 프로그램을 앞에 두고 정박사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울그락불그락 낯빛이 변화무쌍했다. 그가 개발하려던 프로그램 칩은 수성그룹의 이익에도 기여하겠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토대가 되리란 믿음을 가졌었다.

 

  '21세기 국가발전 계획'이라는 제목의 문서철을 빠르게 넘기는 그의 오른손이 부르르 떨리며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머리는 파괴된 프로그램의 복귀 보다는 바이러스를 침투시킨 자가 누구냐는 쪽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권을 노린 경쟁 기업체에서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방해하는 것일까? 그럴수도 있겠지. '포에버 21'이 완성되면 타격이 심할테니까. 그렇게 되면 저들이 준비하는 프로그램은 무용지물이 되겠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기업이기에 이토록 파렴치한 방법까지 서슴지 않는 걸까?'

 

  그는 생각하다말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니겠지. 어떻게 이렇게..... 그것도 아니라면, 내게 개인적인 원한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봤다. 특별히 원한을 살만한 짓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왔을 뿐이다.

 

  살아오면서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 적이 별로 없었다. 그저 제 나이에 맞게 그 때마다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다.

  온갖 생각이 종잡을 없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설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 소리가 나도록 힘껏 내리 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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