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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3회> - 서장 호출에 긴장한 노반장

writerjang 2023. 1. 4. 17:09

2장: 비상

 

  다음 날 아침 7시 27분.

 

  밤새 멀쩡하던 날씨가 새벽부터 쌀쌀해지고 눈발이 한 두 가닥씩 날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알이 굵은 함박눈으로 변했다.

 

  노형석 반장이 형사과 팻말이 붙어있는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바닥에 놓인 발판에다 구둣발을 탁탁 굴렀다. 몇번을 그렇게 같은 동작을 반복하더니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식 출근시간이 무려 1시간이나 남은 시간이었고, 특히 형사계 자체적으로 정한 8시 보다도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숙짖 형사도 자리를 비우고 어딜 갔는지 실내는 썰렁했다.

 

  노반장은 출근시간 교통체증에 아둥바둥대는 싫어 새벽부터 서둘러 집을 나서곤 한다.

 

  그가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이유는 뿐만이 아니었다. 부하직원들에게 늘상 출근시간 만큼은 엄수하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이 늦는다면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는다는 생각은 이제 그의 인생 좌우명처럼 되어 버렸다.

 

  오늘도 그는 새벽 6시에 일어나 30여분 동안 출근준비를 했다. 비상이 걸린 날은 잠에서 깨기 무섭게 뛰어나가기 바빴지만 오늘 같은 평상근무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비상시에는 대개 집에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시간 동안 출근준비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틀 이상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는 늘 부인을 시켜 속옷과 옷가지를 챙겨오도록 했다.

 

  그래도 서에서는 형사과 반장인데 체면이 서려면 외모에서부터 위엄이 풍겨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무려 반시간씩이나 출근준비에 투자하면서도 전혀 아까와하지 않았다. 잠을 좀 덜 자도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세면, 면도, 양치질, 그리고 사복이지만 하의와 상의 셔츠를 고르는 데도 매우 신중했다. 단정하면서도 품위가 있는, 그러면서도 정장 차림에 버금가는 멋을 살리는 사복. 이것이 바로 그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부하 직원들에게도 항상 요구하는 근무복장이었다.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고 무스를 살짝 발라 단정하게 붙였다. 부인이 꺼내 놓은 반듯하게 접혀진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와이셔츠 깃에 향수를 뿌리는 일까지 빼먹지 않았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645분쯤 엊저녁에 미리 세차를 해둬 번쩍번쩍 윤이 나는 소형 승용차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어제 살인사건 한 건을 해결하고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그는 묵은 떼가 묻은 승용차를 닦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출근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마흔살이 넘어서야 겨우 내집마련이라는 서민적인 꿈을 이뤄낸 그는 작년 여름에 일산신도시 33평형 아파트에 입주했다. 경찰생활을 시작한지 17년만의 일이었다. 예전 같으면 공직생활 3년에 집 한 채가 떨어졌다는데 요즘같은 때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약삭빠르게 시류를 타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자신에게도 기회는 여러 있었지만 그래도 유혹에 빠지지 않은 다행으로 여겼다. 지금은 공무원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케케묵은 일까지도 끄집어내 하루에도 수십명씩이나 짤려나가는 판국이었다.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엔 송이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눈이었다. 서울을 향해 차를 몰아가면서 내내 불길한 마음으로 설마설마 했지만 서에 도착할 때쯤엔 눈송이가 보란 듯이 굵어졌다. 겨울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듯 아주 펑펑 쏟아졌다.

 

  일산에서 청량리경찰서까지 막히지 않고 빠질 경우 45분에서 50분 정도가 걸린다. 오늘은 정확하게 52분이 걸렸다. 엊저녁에 힘들여 세차한 게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상이변 때문에 출근시간에 늦는 일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자위했다.

 

  바바리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서 내에서만 입는 카키색 점퍼를 걸쳤다. 책상서랍에서 종이컵을 하나 꺼내 들고 커피 테이블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정부의 물자절약 캠페인에 따라 개인용 머그컵을 사용하고 있지만 유독 노반장 만큼은 사비를 들여 종이컵을 사용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체면치레의 일부였다. 수돗가에서 설거지 하는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른 직원들이 서 내에 있을 때는 될 수 있으면 구내식당이나 로비에 설치되어 있는 커피자판기를 이용했다.

 

  예전엔 부서마다 아르바이트 사환을 명씩 배정받아 잡다한 일에 신경 필요가 없었지만 요즘엔 예산절감이다, 군살빼기다 뭐다 해서 아예 그런 건 바랄 수도 없었다.

 

  말단 여직원을 사환처럼 부려먹던 시절도 이미 지나갔다. 요즘 신세대들은 어찌나 당돌한지 뭐든 업무 외적인 일을 시키면 우선 싫은 내색부터 하고본다. 심지어 신출내기라 할지라도 자기도 당당하게 시험쳐서 들어온 경찰이라면서 따져들기까지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쩌다, 정말 어쩌다 한 번씩은, 그것도 자기 마실 커피를 타면서 미안하다는 생각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에겐 몰라도 반장에게 만큼은 서비스를 하는 여직원도 가끔씩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들끼리는 가위바위보를 하든 사다리를 타든 해서 내기에 진 사람이 뒤집어 쓰는 풍토는 생겨났어도 이유 없는 서비스는 좀처럼 받아보기 힘들어졌다.

 

  예전에 입으로만 커피를 처럼 노반장은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둘'을 공식처럼 외우며 티스푼으로 분말가루를 컵에 퍼 넣고는 정수기의 온수 꼭지를 눌러 뜨거운 물을 받았다. 그 때, 건강을 위해 커피를 삼가라는 마누라의 잔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처럼 커피를 타서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 조간신문을 펼쳐 1면 톱기사에 시선을 던지자마자 과장실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벨소리로 봤을 때 구내전화임이 분명했다. 벨이 두 번째 울릴 때쯤 노반장은 자기 책상 위의 수화기를 얼른 들고 별표를 두 번 눌러 전화를 끌어당겼다.

 

  ", 형사과 노형석입니다."

  "거기 임과장 없나?"

  무뚝뚝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수화기로 쏟아졌다. 그것도 반말로.

 

  자신을 밝히지도 않고 다짜고짜 '임과장'을 찾는 상대의 무례함에 노반장은 기분이 상했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과장보다 높은 사람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일단 참았다. 다른 부서 과장이거나 그 보다 윗사람이라면 웬만하면 목소리를 다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간부는 좀처럼 보기 드물었다. 비상이 아닌 다음에야.

 

  벽시계를 힐끔 올려다 봤다. 745분이었다.

  반장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 서장이요."

  "아 예......안녕하셨습니까? 과장님은 아직 출근 전입니다만......"

  쪼그라드는 소리로 대답하면서 노반장은 속으로 '아니 이 양반 목소리가 오늘 왜 이래? 감기라도 걸렸나......?', 하고 반문했다.

 

  "그럼 출근하는대로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주겠소?"

  ", 알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이, 누구라고 그랬지요......"

  "? 저 말입니까?"

  "그래요."

  ", 저는 형사과 노형석반장입니다."

  비록 말단 간부지만 목소리 정도는 서장도 알텐데, 하면서 아마도 자기를 몰라줬다고 자존심을 내세우는가 보라고 생각했다.

 

  ", 그래요? 그럼 잘 됐네, 노반장이 지금 좀 와주겠소?"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저쪽 편에서 먼저 딸깍,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노반장도 수화기를 내려 놓고 우선 커피를 모금 들이킨 다음, 책상 가운데 서랍을 열어 회의용 수첩을 꺼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올려다 봤다. 분침이 50분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문을 나서려다 말고 문 옆에 걸린 거울에 상체를 들이 밀었다. 멀쩡한 와이셔츠 깃을 오른손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살짝 집어 앞으로 두 번 당겨보았다.

 

  '도대체 무슨 급한 일이길래 출근시간까지도 못참고 나같은 말단을 오라가라 하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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