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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2회> - 괴한 침입으로 얼룩진 연구실

writerjang 2023. 1. 4. 12:22

  정박사는 정신을 수습할 없었던지 창가를 마냥 서성거렸다. 한참을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다시 본래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우스로 아이콘 하나를 클릭했다. 컴퓨터 본체에 설치된 모뎀에서 다이얼톤이 카랑카랑하게 들려왔다. 연결음이 울렸다. 왼손으로 모니터 상단에 달린 카메라를 켜고 렌즈 위치를 조절했다. 화상통신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그에게 물어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심한 갈증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자타가 공인하는 그 좋은 머리도 점점 둔해져만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 '굿 모닝' 하며 혀 꼬부라진 외마디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곧이어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노랑머리에 파란눈을 가진 외국인의 얼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모니터의 외국인은 반가움에 들떠있었다.

 

  '그렇지 그곳은 지금 아침이겠군? 우선 인사부터 해야겠지? 그 다음엔......?'

  대화가 시작됐다. 정박사가 심각한 얘기로 화두를 던졌다. 밝게 웃던 외국인의 얼굴도 점차 심각하게 변해갔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은 계속 영어로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점점 대화에 몰입되어 갔다. 그렇게 십여분이 흘렀다.

 

  바로 그의 오른 뒤쪽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서서히, 그러나 민첩한 몸놀림으로 정박사를 향해 시커먼 그림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괴한이었다. 얼굴엔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 썼고 손엔 예리한 일제 사시미 칼을 들고 있었다.

 

  괴한이 재빠르게 몸을 놀려 움직이자 시퍼런 칼날이 휘영청한 달빛에 부딪혀 번뜩 섬광을 발했다.

 

  괴한은 정박사로부터 불과 발짝도 안되는 거리까지 접근해왔다. 그 때까지도 정박사는 여전히 통신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니터에 담긴 외국인을 빤히 들여다 보며 심각하게 영어로 말을 만들어내기 바빴다. 괴한이 바로 뒤에 다가와 섰을 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낌새를 차리지 못했다.

 

  바로 , 화면 속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면서 손가락을 들어 정박사를 가리켰다. 아니, 정확하게 정박사의 뒤를 가리켰다. 매우 다급한 순간이었다. 그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정박사는 갑작스런 외국인의 행동에 의아스러워 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화면 속의 외국인은 진정하기는 커녕 더욱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신없이 괴성까지 질러댔다. 정박사쪽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엔 더욱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박사는 화면 노랑머리가 무엇을 말하려는 알아차렸다.

 

  순간, 정박사는 고개를 뒤로 획 돌렸다. 그러나 그의 목에는 이미 시퍼런 칼날이 겨누어졌고 미처 뿌리칠 틈도 없이 칼날이 그의 목 깊숙히 파고들었다. 검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으악!"

 

  비명소리가 유난히 컸지만 연구실의 밀폐된 공간에서 질러댄 소리는 벽에 부딪혀 쩌렁쩌렁 울릴뿐 바깥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어 정박사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의자 앞으로 꼬꾸라졌다. 머리가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쾅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괴한은 오른 손으로 카메라 렌즈를 막고 왼손으론 컴퓨터 전원스위치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재빠르게 스위치를 찾아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은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눈은 정박사를 주시하고 있으면서도 전원스위치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목에 치명상을 입고 유혈이 낭자했지만 아직 정박사의 목숨은 간신히 붙어있었다. 아련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그는 어느새 책상에서 저만큼 떨어진 곳으로 기어가 있었다.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목을 움켜쥔 채 괴한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안간 힘을 다해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괴한이 복면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아니, 너는......?"

  "흐흐흐, 그렇소 바로 나요. 난 십이 년 동안 이 날 만을 기다려 왔소...... 날 원망하지 마시오. 모두가 당신이 자초한 업보니까, 흐흐흐."

  괴한의 입에서는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다. 이 순간엔 당당해야 한다고, 아니 통쾌할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해왔지만 정작 상황이 벌어지자 괴한의 얼굴은 극도로 상기되고 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네가............, 나를......?"

  정박사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이어갔다.

 

  "글쎄, 그건 당신이 더 잘 알텐데? .......년 전 일을 잘 생각해 보시오. 당신은 살인마야! 마땅히 죽어야만......."

 

  괴한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정박사는 고개를 떨구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괴한은 널부러진 정박사의 왼편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심장의 박동이 약해졌다. 그리고는 이내 숨이 멎었다. 겨우 두 마디가 오고갔을 뿐인데.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육체는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바닥은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하나......'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벼르던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보통 당황스러운 아니었다. 일을 치르고 난 뒤부터 몸이 더욱 심하게 떨려왔다. 마치 오한이 온몸을 엄습해오는 느낌이었다.

 

  우선 칼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어깨에 메고 있던 배낭에 넣었다. 피묻은 면장갑을 조심스럽게 벗어 배낭에 넣고 새 것으로 갈아꼈다. 천장으로 나있는 환기구 밑으로 책상을 힘겹게 끌어다 놓았다.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그 위로 올라섰다. 환기구 바로 옆으로 뻗은 튼튼한 철골에 미리 준비한 등산용 루프를 매달고 천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환기구 뚜껑을 조금 삐딱하게 닫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몸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책상과 의자를 본래의 위치에 끌어다 놓았다.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몸은 떨렸지만 그래도 침착하려고 애썼다. 바닥에 떨어진 복면을 집어들었다. 배낭에 넣었다.

 

  엎어져 있는 정박사의 시체를 힐끔 돌아봤다. 그 순간 정박사의 몸이 꿈틀거렸다.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괴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으으으......!"

  정박사의 입에서 처절한 절규가 흘러나왔다.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이미 개미새끼 만큼 작아져 있었다. 이내 그는 완전히 숨이 끊어졌는지 더 이상의 미동도 없었다.

 

  괴한은 죽은 정박사의 왼쪽 팔에 채워져 있는 손목시계를 30분쯤 뒤로 돌려놓은 뒤 팔을 위로 들었다가 바닥에 패댕이쳤다. 퍽 소리와 함께 시계가 바닥에 부딪히면서 유리가 깨졌고 바늘도 멈췄다. 이제 완벽하게 끝났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리는 있었다. 무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고개를 바깥으로 내밀어 복도 양쪽 끝을 둘러본 다음 한 발짝 성큼 나갔다. 천천히 닫았는 데도 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는데 뇌리를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차!'

  그는 서둘러 문을 다시 열고 책상 위의 컴퓨터로 달려들었다.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파일찾기를 가동시켰다. 최근에 저장된 자료를 찾았다.

 

  마우스로 파일을 클릭하자, 아니나 다를까 방금 전에 정박사가 외국인과 통신하던 기록이 저장되어 있었다. 바이러스 영향 때문에 파일은 깔끔하게 저장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굳이 트집을 잡는다면 물증으로서 충분한 자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됐다. 서둘러 파일을 삭제시켰다. 전원스위치를 눌러 컴퓨터를 완전히 껐다.

 

  그리곤 방문을 닫고 조용히 걸어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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