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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31회> - 심각한 사랑타령 일색인 일기

writerjang 2023. 1. 20. 23:41

  살해된 정박사는 자기 컴퓨터의 암호를 사실은 연구원들에게 만큼은 알려놓고 있었다. 동찬은 전에 손중선박사가 이 컴퓨터를 만지며 바로 암호를 타이핑해 넣던 것이 떠올랐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파일은 연구원들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내용인지 암호를 달리 사용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미국 유학시절 이전부터 사용하던 암호였을 것이다. 아무리 변형시켰다 해도 같은 생년월일을 암호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누군가 정박사가 고이 간직하고 싶은 사람의 생년월일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을 살펴보았다. 내용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개인적인 내용을 담은 일기 같았는데, 모두 한 파일에 담아 날짜를 표기하고 그냥 쪽수에 관계없이 무작정 써내려간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 일기가 쓸 때마다, 앞의 일기 뒷자리에 최근의 내용이 채워지는 상태였던 것이다. 커서는 맨 뒤부분인 최근의 일기 쪽으로 가 있었다.

 

  마지막 일기부터 읽어보던 동찬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마지막 일기는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이틀 전에 쓴 것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최근들어 이상하게도 꿈에 JIN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벌써 12년이 지난 일인데 아직도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그녀가 떠나질 않았는가 보다. 모든 게 나의 업보려니 하고 살자. 차마 몹쓸 짓을 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우리 두 사람의 운명인 것을......'

 

  일기는 아주 심각한 사랑타령 일색이었다. 파일 제목이 JIN이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JIN이라면 성을 얘기하는 건지, 이름의 맨 마지막 자를 지칭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두 사람만의 애칭? 아무튼 정박사 주변에 'JIN'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일기의 윗부분으로 이동했다. 일기의 처음은 4년 전인 19953월자로 기록돼 있었다. 처음부터 내용은 굉장히 장황했다.

 

  '이제 교수생활 두 해째를 맞았다. 오늘 새학기가 시작돼 첫 강의에 들어갔다. 지난 학기 낯을 익혀두었던 얼굴들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또 새로운 얼굴들이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떠나 보내는 마음은 아쉽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얼굴들과 마주하며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 교육자란 직업에 실증내지 않는 지도 모르겠다.

 

  컴퓨터나 만지는 공과대 출신인 내게도 이런 감수성이 살아있다는 놀랍다...... 아직 컴퓨터 공학과 전공과목 강의는 맡을 경력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학기도 역시 교양컴퓨터 과목을 맡게 됐다. 오히려 다양한 학과의 학생들을 접할 수 있어 내게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희안한 일이 벌어졌다. 강의를 하다가 얼핏 둘러보니 학생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 학기 학생도 아니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의 얼굴 같았다. 갑자기 옛일이 떠오르더니 가슴이 시리도록 저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강의 시간 한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강의시간 동안 그 얼굴만 몇 번씩이나 쳐다봤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강의를 마치자마자 강단에 서서 수강신청서철을 찾아봤다.

  이단비. 행정학과 1. 그럴 리가 없는데......'

 

  '이단비라........! 이름 참 예쁘네!'

  일기는 오랜 세월에 걸쳐 쓰여진 것이었지만 내용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쓴 적도 있고 어떤 때는 거의 일년만에 쓴 것도 있었다. 또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들어와 동찬은 유심히 읽어봤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김에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시냇물이 흐르고 신록이 우거진 숲속의 마을. 오대산의 정기가 곳곳에 배어 흐르고 있는 곳. 옛날엔 고작 10가구도 살지 않았다던 마을이 이젠 꽤 번창했다. 그녀가 태어난 이곳은 그녀 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구나......'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았다. 가는 곳마다 추억이 서려 있어 옛일이 절로 떠올랐다. 투명한 실개천을 감싸안은 길다란 강둑 위에 깔린 금잔디, 뒷산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오솔길, 수평선 끝자락과 맞닿은 푸르디 푸른 초원. 대자연을 함께 거닐며 문학도의 꿈을 키우던 그녀의 해맑은 미소가 푸른 하늘 위를 수놓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어디선가 회오리 바람이 몰아쳐 하늘로 솟구치더니 그렇게도 맑던 하늘을 잿빛으로 물들였다. 그녀의 맑은 얼굴은 바람에 스러지듯 사방으로 흩날려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쓰린 추억이 되살아나 서서히 저려오기 시작했다.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에 비겁하고 초라한 40대의 자화상이 서 있었다. 인간 정일준의 혐오스러운 자화상이......'

 

  여자에게 뭔가 죄를 짓고 번뇌하는 내용이었다. 일기로는 여자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학소녀였다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동찬은 흥미진진한 내용에 점점 빨려들어갔다. 컴퓨터 공학박사의 일기에 이런 감수성이 담겨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동찬은 프린터에 용지가 있나 확인한 뒤에 내용 전체를 프린트 했다. 오늘 조사한 내용중엔 가장 큰 수확이었다.

 

 

**********

 

  양형사를 부르며 뒤따라 나갔던 조형사는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양형사에게 말을 꺼냈다. 양형사는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이동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친굴 어디서 찾나?"

  "누구...... 그 손중선이란 사람 말입니까?"

  "그래, 그 수석연구원 말야."

  "그냥 퇴근해버렸으면 오늘은 만나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술집으로 갔다는 건 틀린 얘기 같습니다."

 

  양형사는 연구실에서 정박사의 휴대폰을 찾으면서 어느새 동찬과 조형사가 떠들며 나누던 대화도 들었나보다. 내용을 훤히 알고 있었다.

  "술집엔 왜 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술을 전혀 할 줄 모른답니다."

  "아니, 양형사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연구소 정문으로 들어오다가 손중선이란 사람이 연구원들한테 둘러싸여 나가는 걸 봤습니다. 연구원들이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하니까, 손박사가 자기는 원래 술을 못하는 거 모르냐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거부하는 걸 봤습니다. 그냥 혼자 집에나 가겠다고 그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진작에 그 얘길 안했어?"

  "......"

  양형사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단지 속으로 옛말이 떠올라 살짝 미소를 흘렸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란다고......'

  옛말이 틀린 하나도 없었다.

 

  "행정실에 알아봐서 집으로 한 번 찾아가 보십시오."

  "그래야 겠어. 오늘 그 친굴 만나지 못하면 반장 얼굴을 어떻게 보나?"

  조형사는 주차장 가까이 와서야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갔고 양형사는 차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양형사는 우선 정박사의 수첩을 자세히 살펴봤다. 뒷부분 전화번호란에는 몇 개의 번호가 적혀있었지만 대부분 관공서나 연구원들의 전화번호였다. 정박사는 사람 이름 석자 뒤에 '박사' '연구원'이니 '교수'니 하면서 정성스럽게도 호칭을 꼬박 붙여놓아 양형사는 찾는 전화번호가 없음을 쉽게 알아차렸다. 이런 호칭이 붙지 않은 사람의 이름은 모두 남자이름들이었다. 역시 애초 생각대로 정박사가 아무리 낯이 두꺼운 사람일지라도 그건 이런 수첩에 보란 듯이 적어둘 전화번호는 분명 아니었다.

 

  이번엔 정박사의 휴대폰을 꺼내봤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파워스위치를 눌렀다. 한참만에야 파워가 들어오고 휴대폰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휴대폰은 충전지가 다 됐는지 곧바로 다시 꺼졌다. 어차피 이동통신 대리점에 비밀번호를 문의하기 위해 찾아갈 생각을 했었다.

 

  양형사는 차를 몰아 이문동으로 향했다. 최영호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까지는 약 25분이 걸렸다. 차를 길에 세워두고 다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시간이 5분이나 남았다. 전형적인 노땅 다방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나 들락거리며 레지 아가씨 엉덩이나 만진다는 변두리 다방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어서 오세요."

 

  입구로 들어서자 마담 같이 생긴, 나이 좀 든 여자가 때아닌 젊은 사람의 등장이 놀라웠는지 양형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목소리만큼은 더없이 간드러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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