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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32회> - 양미주의 불륜과 사건의 연관성

writerjang 2023. 1. 21. 00:33

  양형사는 노땅 다방의 이런 분위기가 어색해 머쓱해졌다. 아무데나 문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서둘러 앉았다. 젊은 레지 아가씨가 그의 뒤를 따라와 엽차잔을 탁자에 내려놨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스무살은 넘기 어려운 앳된 얼굴이었다. 레지는 추운 겨울을 모르고 지내는듯 아주 시원한 여름 옷차림이었다. 낯선 젊은 손님의 당황하는 눈치를 훤히 읽고 있는 듯 그녀가 먼저 어색함을 깨뜨리려고 말을 던졌다.

  "손님 또 오세요?"

  "네."

  "차는 오시면......?"

  "아니요, 우선 뜨거운 커피 한 잔 주세요."

  "네에, 뜨거운 걸루 한 잔요."

 

  레지가 돌아가고 나서야 조금 당황스러움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마음이 진정되니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 한쪽 구석에선 아주 난리가 났다. 육십이 가가워 보이는 중늙은이가 손녀딸 같은 레지의 허벅지를 만지며 키드거리고 있었다. 구쁘러움이나 체면 같은 건 내다버린지 이미 오래된 사람들 같았다. 하는 짓들이 보통 징그러운게 아니었다.

 

  이젠 얼굴이 달아오르지도 않았다. 그냥 분노만 솟구칠 뿐이었다. 남들은 저렇게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요즘 육십이면 한창인데 대낮부터 이런 음침한 데 죽치고 앉아서 하는 짓이라고는.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구식 다방이 있는 걸 보면 장사가 되긴 되는모양이었다. 아직도 이런델 찾는 인간들이 저렇게 있으니 장사야 잘 되겠지!

 

  1 10분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캐주얼 정장 차림의 사내가 출입문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옷차림새는 아까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던 그 기생오라비와 꼭 맞아 떨어졌다. 마담에게 뭔가를 묻는 듯 하더니 양형사쪽으로 걸어왔다. 역시 예상대로 그가 바로 최영호였다. 이번에도 레지는 어김없이 따라왔다.

 

  "청량리경찰서에서......"

  "최영호씨? 앉아요!"

  양형사가 자리를 권했다. 아까 양형사에게 차를 날랐던 그 레지가 이번에도 차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특이한 건 레지가 기생오라비를 '오빠'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그를 오랜 단골처럼 대했다. 차주문을 받고 레지가 돌아가고 난 뒤 양형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박사가 살해당했어요. 만약 제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당신이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어요. 알겠어요?"

 

 

  양형사의 일침에 기생오라비는 찔끔하며 오금이 저리는 표정이었다. 이런 쪼다 같은 인간의 어디가 그렇게 좋다고 바람을 피워대는지, 부잣집 마나님들의 생리구조를 해부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기 때문일까? 꼭 인형 가지고 놀듯?

 

  "황미주씨는 언제부터 만났어요?"

  "아니 저...... 만났다기 보다는......"

  "똑바로 말해요! 어차피 난 당신들의 불륜사실을 캐러 나온 건 아니니까!"

  양형사가 상대를 윽박질렀다. 그의 미천한 경찰경력으로 봤을 때 이 정도 엄포는 사실 상상이 안갈 정도로 노련한 행동이었다.

 

  ", 한 일년쯤 됐어요........"

  "그럼 빼먹을 만큼 다 빼먹었겠네?"

  양형사가 비웃음 섞인 반말을 뱉았다. 이쯤되면 아마 경찰생활에 이골이 난 베테랑 같아 보일 정도였다. 상대가 찔리는 게 많은 기생오라비이기 때문에 양형사의 기가 더 펄펄 살아나는 것일까?

 

  "빼먹다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도 꼴에 남자라고 빼먹는다는 표현은 듣기 싫은 내색이었다. 치사한 인간.

 

  "빼먹지 않으면 뭐요?"

  "그냥 차비나 하라고 주길래 몇 푼 받은 것 밖엔 없어요. 정말이예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 때 커피를 들고 온 레지가 두 사람의 대화가 심상치 않아 보였던지 걸어오던 발길을 주춤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레지가 조용히 커핏잔을 내려놓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황미주씨 남편이 정일준박사라는 건 알고있었죠?"

  "그건 정말 몰랐습니다. 남편이 누구든 우리 사업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냥 집안에 돈만 많으면 그만이죠."

  최영호의 말에 갑자기 양형사가 발끈하며 큰소리를 쳤다.

 

  "당신이 황미주 보고 같이 살자고 했잖아! 남편하고 이혼하고."

  신출내기 양형사는 어디서 보고 배웠는지 이럴 땐 넘겨짚어보는게 최고의 취조 수단이란걸 생각해냈다. 영화나 드라마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아니 저...... 같이 살자고는 해봤는데...... 이혼하라고 한 적은 절대 없습니다. 믿어주세요."

  이런 나약하고 한심한 인간이 과연 파리 한 마리라도 죽일 수 있을까? 양형사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살인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이란 심증이 굳어졌다.

 

  "그거나 그거나! 이 사람이?"

  최영호는 양형사의 강한 어조에 잠깐 주눅이 들었지만 오히려 더 큰소리로 극구 부인했다.

 

  "그리고 제가 왜 그 아줌마하고 삽니까? 세상에 예쁜 처녀들이 널렸는데......"

  내친 김에 나온 말이라고 이젠 아주 술술 얘기도 잘했다. 거짓이 담긴 진술 같지는 않았다.

 

  "그럼 28일날 어디서 뭐했어요?"

  "28일이면...... , 생각났어요. 그 날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그런데 저녁 9시 반쯤일 거예요. 난데없이 그 아줌마가 전화를 해서는 지금 바로 나오라고 하길래......, 어떡합니까 싫어도 할 수 없이 나갔죠. 팬 관리 차원에서."

 

  9시반이라면 정박사가 야근을 알리기 위해 집에 전화를 했다는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황미주는 정박사 전화를 끊자마자 기생오라비에게 연락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어지간히도 급했나보군. 참 대단한 화상들이야!'

 

  "그 아줌마라는 게 황미주를 말하는 거죠?"

  "그럼 지금 그 아줌마 말고 누구 얘길 하겠어요."

  "그래서 그 뒤엔 어떻게 됐어요?"

  "뭐가 어떻게 돼요? 뻔하죠.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도 이 아줌마가 아예 집에 들어갈 생각도 안하더라구요. , 오늘은 아주 밤새도록 진하게 놀자나?"

  "그래서?"

  ", 그래서 밤새 그 짓을......"

  "그럼 여자가 외박까지 했단 말이야?"

  양형사는 분노가 치밀어 이젠 아예 반말은 물론이거니와 황미주란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고 그냥 여자라고만 표현했다.

 

  "새벽 6시가 다 돼서 호텔방을 나갔으니까, 뭐 외박 한 거나 마찬가지죠?"

 

  자기 남편이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여자는 밤새도록 기생오라비 같은 놈하고 놀아났는가 보다. 뭐라 표현할 말이 없었다. 양형사는 수첩에 그의 진술을 또박또박 적어가며 물었다.

  "여자 혼자 나갔어?"

  ", 저는 다음날 9시쯤에 나갔어요."

  "어디 있는 무슨 호텔?"

  ", 거기가......"

  갑자기 기생오라비가 머뭇거렸다. 그것도 자기 아지트라고 밝히길 꺼리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야 알아듣겠어?"

  "예예, 말할게요..... 남산에 있는 H호텔입니다."

  "아주 고급으로 놀아나셨구만?"

  기생오라비가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는 말이 없었다.

 

  "당신! 만약 지금 한 말 중에 하나라도 거짓이 있으면 당신은 곧바로 살인범이 되는 거야, 알았어?"

  "?......."

  기생오라비는 기력을 다 잃어버린 새처럼 어깻죽지가 축 늘어졌다. 그런 모습이 가엾다 못해 안타깝기까지 했다. 그러나 양형사는 내친김에 쐐기를 박아두려고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다시 찾을지도 모르니까 만약에 잠수하면 그 땐 정말 재미없어?"

  "......"

  기생오라비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은 뒤 양형사는 탁자에 천원짜리 두 장을 던져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쯤 했으면 녀석이 충분히 지쳤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담과 레지들의 소프라노조의 상냥한 인사를 듣는둥 마는둥 출입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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