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WRITERJANG

소박한 글쓰기

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34회> - 휴대폰 비밀번호, 그리고 DANBEE

writerjang 2023. 1. 22. 01:21

  간단하게 대답을 한 뒤 여직원은 파워스위치를 눌렀다. 전원이 들어왔다가는 금세 꺼져버렸다. 여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귀퉁이에 놓여진 커다란 박스를 잠깐 뒤지더니 충전기 하나를 꺼내 휴대폰 아래 전원 잭에 맞춰보았다. 신기하게도 딱 들어맞았다.

 

  여직원은 이미 휴대폰에는 숙달된 전문가 같아 보였다. 오랜 경력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손놀림은 능수능란했다. 다이얼 단추를 상하좌우로 정신없이 눌러대더니 조그만 액정화면에 마침내 비밀번호가 떴다.

  '1205'

 

  비밀번호를 알아내긴 했지만 양형사가 찾으려는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는 확신은 아직 없었다. 연구소 주차장에서 잠깐 보긴 했지만 그 때는 충전지가 방전되어 있어 더 이상 휴대폰을 작동시킬 수가 없었다. 양형사는 여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에서 찾아볼 요량으로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양형사는 우선 메뉴 단추를 눌러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기억장치로 들어갔다.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는 일련번호로 44번까지 입력되어 있으니까 0번부터 치자면 모두 마흔다섯 개라는 얘기가 된다. 마흔다섯 개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찾아보자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은 분명했다. 우선 잠금장치를 걸어둔 번호를 골라내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저장번호 0번부터 하나씩 화면에 띄워보았다. 그 중 잠금장치를 걸어놓은 전화번호는 0번과 30번 단 두 개였다. 두 번호 중에 하나라면 일은 아주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

 

  휴대폰을 들고 한참동안 씨름하고 있는 양형사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여직원은 어느새 정박사의 죽음 같은 건 잊어버렸는지 그가 번호를 눌러가며 고개짓을 하는 행동에 간간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0번을 눌렀다. 화면에 비밀번호를 요구하는 메시지가 떴다. '1205'를 차례대로 눌렀다. 전화번호와 이니셜이 떴다.

  'DANBEE 215-4999'

  양형사는 수첩에 이니셜과 전화번호를 적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DANBEE......? 단비? 도대체 단비가 뭐야?'

  사람 이름이라기 보다는 꼭 무슨 술집이나 카페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슨 암호 같기도 했다. 앞에 지역번호가 따로 없는 걸 보면 정박사 휴대폰과 같은 대한이동통신 휴대폰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DANBEE'는 사람이름 '단비'가 틀림없었다.

 

  '단비? 그러고 보니까 이것도 꽤 예쁜 이름이네? 요즘엔 여자 이름들은 아주 잘 짓는단 말야.'

  양형사는 일단 수첩에 적어두고 30번도 열어보기로 했다. 30번은 'EMERG 733-773×'였다. 'EMERG' 'EMERGENCY'의 약자인 것 같았다. 이 번호도 일단 적어두었다.

 

  "여기 DANBEE라고 쓰여진 전화번호도 014번 같은데, 가입가 주소지를 알 수 있나요?"

  "우리 대리점 가입자가 아니면 알 수가 없어요."

  "그럼 다른 방법은 전혀 없나요?"

  "방법이 전혀 없는건 아니예요. 본사에 알아보는 방법이 있어요."

  "좀 부탁해도 될까요?"

  "잠깐만요."

  여직원은 수화기를 들고 전화기 단추를 부지런히 누르더니 저쪽편과 뭐라뭐라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어떻게 됐어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그 때 그녀의 컴퓨터에서 '딩동' 하고 경쾌한 기계음이 울림과 동시에 레이저프린터에서 하얀 A4용지가 롤을 돌면서 검정색 글자를 담아 바깥으로 밀려나왔다. 이 대리점에선 컴퓨터 팩스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저기 벌써 나왔네요."

  ", 그래요?"

  초고속시대의 신속한 정보 유통이란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았다. 바야흐로 때는 초고속정보통신 시대니까.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받게 된 거죠?"

  "제가 뻥을 좀 쳤죠."

  신이나서 ''이라는 단어를 거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내뱉은 여직원은 말을 하고나선 좀 쑥스러웠던지 씽긋 웃으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양형사가 영문을 몰라 아무 대답없이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여직원은 견딜 수 없었던지 스스로 실토를 했다.

 

  "지금 가입자가 찾아와 전화가 잘 안터진다며 무턱대고 해지해달라고 해서 좀 심각하게 됐다고......."

  여직원이 변명을 하면서 양형사의 눈치를 살폈다. 딴에는 하느라고 했는데 마치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으로 취급당할까봐 께름칙했던 모양이었다.

 

  ", 아주 잘 하셨어요. 이 은혜 잊지 않을 겁니다."

  형사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여직원은 프린터물을 뽑아 양형사에게 가져다 주는 친절까지 보였다. 거기엔 주소, 집 전화번호, 생년월일 등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상세한 신상명세서가 들어 있었다.

 

  "하슬기씨!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또 볼 일 생기면 이 웬수는 그 때 갚을게요."

  여직원은 친한 척 자기 이름까지 불러주는 그의 말에 그냥 한 번 픽하고 웃어넘겼다. 아마 판촉을 하다보면 손님들한테 한 두 번 들어본 소리가 아닐 것이다.

 

12: 납치

 

  수성그룹 연구소 정문 건너편 50여미터 떨어진 지점에 청색 15인승 승합차가 한 시간째 서 있었다. 승합차는 겉보기엔 보통 차량과 다를 바 없었지만 내부는 특수 제작된 것으로 무선 통신시설, 망원 감시카메라, 컴퓨터 시스템, 무기고까지 설치돼 있었다. 차 안에는 세 명의 사내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사내는 머리에 헤드마이크를 끼고 통신을 주고받고 있으며, 또 다른 사내는 모니터로 전방을 감시하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내는 콜트 권총을 뽑아들고 창밖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시가전을 기다리는 군인들 같은 모습들이었다.

 

  헤드마이크를 끼고 있는 사내가 상대편에게 말했다.

  "아직 목표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방금전에 퇴근했다니까 이제 곧 나타날거야. 놓치면 끝장이야!"

  ",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똥파리 없나 잘 살펴보고."

  "!"

 

  그 때 모니터로 전방을 감시하던 사내가 헤드마이크 사내의 어깨를 흔들며 다급하게 외쳐댔다.

  "그 자가 나옵니다."

  헤드마이크 사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전방에 목표물 떴습니다!"

  "그래? 상황은?"

  "다른 놈들 너댓명하고 같이 있습니다."

  "똥파리 아냐?"

  "아닌 것 같습니다. 연구원들인 것 같습니다."

  "혼자 남을 때까지 기다려!"

  "!"

  "시동 걸고!"

  "!"

  헤드마이크 사내가 대답을 하며 모니터를 지켜보던 운전석의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이어 시동이 걸리고 차는 출발준비를 완료했다.

 

  후문 쪽에서 회색 그랜저가 슬슬 움직이더니 정문 방향으로 선회했다. 차는 짙은 감색으로 선팅을 해 가까이에서 보기 전엔 밖에선 내부가 잘 안보였다. 차 안에는 힘 꽤나 쓰게 생긴 덩치들이 뒷자리에 두 명 앉아 있었다. 앞 자리엔 중키에 깡마른 사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조수석엔 짙은 갈색 선글라스를 낀 검정색 정장의 훤칠한 사내가 무전기를 들고 작전지휘를 하고 있었다.

 

  "현재 상황!"

  "아직 정문 앞에 모여 있습니다."

  "혼자 남으면 바로 무전 날려!"

  "!"

 

  무전이 오가는 사이 회색 그랜저는 승합차 옆을 지나쳐 정문을 향해 느린 속도로 달려갔다. 그랜저는 연구원들이 모여 있는 정문 앞까지 거의 다다랐다. 그 때 손중선 박사가 그랜저를 곁눈질로 힐끔 쳐다봤다. 그랜저는 정문을 지나 곧바로 앞으로 전진했다. 지휘차량이 상황을 직접 살피기 위해 현장을 순찰한 것이었다. 지나가는 차로 위장하고.

 

  그랜저는 정문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속도를 내 달리더니 우회전을 몇 번 하고는 다시 연구소 담 옆길로 돌아 후문을 지나 정문쪽 승합차와 1백여미터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

 

  그 때 무전이 날아왔다.

  "목표물이 놈들하고 같이 사거리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래? 움직여!" (계속)

 

포에버 21 <35회>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