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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36회> - 손중선의 엉뚱한 유학 계획

writerjang 2023. 1. 24. 01:23

  택시가 길가에 정차하자 예상대로 놈들은 아무런 말도, 요금에 대한 아무런 제스처도 없이 뛰어내리기 바빴다. 택시기사는 창문을 열지도 않은 채 덩치들에게, 아니 정면을 똑바로 주시한 상태에서 욕을 한마디 내뱉었다.

  "에잇, 더러운 놈들아!"

  그러나 그 목소리는 자기가 듣기에도 모기 소리만큼이나 작았다. 그냥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하자, 고 마음먹고 택시는 놈들이 떠나기를 기다렸다. 덩치들이, 그야말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민첩한 동작으로 뒷자리에 올라타자 그랜저는 급출발을 해 택시를 지나쳐 금세 버스 뒤를 쫓았다.

 

  택시기사는 이제사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지 핸들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좌측 깜빡이를 넣고 출발하려 했다. 그런데 조수석에 뭔가 있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봤더니 시퍼런 배추이파리 한 장이 거기에 있었다. 세종대왕의 얼굴이 분명했다. 기사는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갑자기 덩치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기특한 놈들, 헤헤!'하며 흡족해 했다. 그 때 15인승 승합차가 택시 옆을 스쳐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버스가 하안동 외곽에서 정차하고 손중선이 내렸다. 그의 뒤를 따라 버스에 올랐던 덩치가 뒤쫓아 내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작전이 시작됐다. 그런데 선글라스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기명령을 내렸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 가는지나 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랜저에서 무전기를 든 사내만 다시 내려 손중선의 뒤를 멀찌감치에서 밟았다. 버스에서 내린 덩치는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승합차가 앞에 정차하자 올라탔다.

 

  "일단 어디로 가는지 살피기만 해. 눈치 못채게 하고."

 

  두 대의 차량은 먼 발치에 정차해 인도 위의 쫓고 쫓기는 추격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중선이 골목을 돌아 사라지자 그 때서야 차량 두 대가 동시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중선이 사라진 골목 쪽으로 차들이 느린 속도로 진행했다.

 

  "어디로 가고 있나?"

  "식료품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식료품가게? 거긴 왜 들어갔을까? 갈증 때문일까? 아니면 음료수라도 사가지고 어디 인사라도 가는건가? 선글라스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봤다. 아직은 좀 두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

  "!"

 

  5분쯤 후에 손중선은 손에 음료수 박스를 들고 가게 바깥으로 나와 인도를 따라 걸어갔다. 무전기의 사내도 차들도 조금씩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눈치 챈 것 같지는 않았다. 인도를 걷던 손중선이 그 동네 변두리에 위치한 대문이 활짝 열린 집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대문 옆에는 조그마한 간판도 달려 있었다. 무전기를 든 사내가 사주경계를 하며 다가가 대문 옆 간판을 올려다 봤다. 천사의 집.

 

  "여기는 고아원인 것 같습니다."

  "알았다. 상황보고 계속하고!"

 

  고아원? 숨겨둔 자식놈이라도 있나? 하여튼 이젠 놈의 행선지도 알아냈고 놈이 나올 때 낚아채기만 하면 된다.

  "놈이 나오면 무전 날려, 알았어?"

 

  선글라스는 차안에 타고 있는 덩치와 뒤쪽 승합차의 덩치를 차에서 내려 손중선을 낚아 챌 준비를 하도록 시켰다. 손중선이 대문을 나서고 버스 정거장으로 향할 때쯤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선글라스는 승합차에 연락을 띄웠다. 손중선을 낚아 챈 후에 앞차가 출발하면 바로 고아원으로 들어가 그가 방문한 이유를 알아내도록 지시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뒤 선글라스는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기다렸다.

 

  손중선은 '천사의 집'에 들어간지 30분만에 나왔다. 아무도 바깥으로 따라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손중선이 다섯 걸음 쯤 걸었을 때 골목 안에 숨어있던 무전기의 사내가 행동을 지시했고 두 명의 덩치들이 민첩하게 튀어나와 손중선의 등뒤로 성큼 다가섰다. 덩치들은 손중선을 에워싸고 다짜고짜 그의 팔을 뒤로 꺾었다. 동시에 그 중 한 명이 손수건으로 손중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후 손중선이 정신을 잃자 덩치들은 손중선을 길가에 대기하고 있던 그랜저 뒷좌석에 밀어넣어 앉히고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차는 서서히 서울로 향해 출발했다. 손중선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그들이 하는데로 당해야만 했다.

 

 

13: 정체

 

  조형사는 연구소 행정실에서 손중선의 신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를 쓰고 있었다. 괜히 자기 업무에 바쁜 사람들을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하면서 괴롭혔다. 그러나 조형사는 이런 연구소의 행정실도 사실은 무슨 협회니 단체니 하고 간판만 내걸고 있는 사무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곳엔 의례히 할 일 없이 월급만 축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조형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형사는 그들에게 아무리 업무 외의 수고로움을 요구한다 해도 전혀 미안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조형사가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바로 남들은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자리만 채우고 앉아서 매달 월급만 꼬박 챙겨가는 실질적인 불로소득자들이었다. 우리나라 현실의 한 단면을 조형사는 심정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서 입도 벙긋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공무원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공무원이 국가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남들에게 보이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 같은 경우를 만나면 좋은 기회다 싶어, 그들에게 애를 먹이는 재미를 만끽함으로써 평소 쌓여던 불만을 해소하곤 한다.

 

  조형사는 전에 복사해간 개인 신상명세서 보다 좀 더 자세한 기록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더 자세한 정보는 확보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조형사는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었다.

 

  손중선의 거주지나 생년월일은 이미 확보해둔 신상명세서에 상세히 기록돼 있었고, 그의 박사과정까지의 학력에 대한 기록도 확보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한 가지 더 추가로 알게 된 사실은 그가 곧 유학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손박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 주립대학에서 미술대 조형학과 학부과정에 입학허가를 받아둔 상태였다. 물론 개인적인 유학이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컴퓨터공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더욱이 국가에서도 알아주는 촉망받는 인물이 예술계통으로 전공을 바꿔 유학을 간다는 게 이상했다.

 

  '조형학과라니? 그것도 학부과정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조형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손중선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취미생활 삼아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릴 들어보긴 했지만 유학까지 간다는 건 그저 취미생활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컴퓨터를 하다보니 이제 이골이 나서 인생을 바꿔보려는 것일까? 나이가 서른 둘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정적인 기반을 갖추는 때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모험을 자초하는 사람이 과연 정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조형사는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조형사는 일단 손중선을 찾아보기로 했다. 집에 몇 번씩이나 전화를 해봤지만 자동응답기만 돌아갈 뿐 손중선은 집에 없는 것 같았다. 어렵게 찾아간 그의 집은 아현동 산동네였다.

 

  찾아가는 길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손중선은 단칸 사글셋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조형사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사출신 연구원이면 웬만큼은 생활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혹시 유학계획 때문에 학비를 모으느라 사는 모습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억지로 이해하려고 해봤다.

 

  조형사는 유학계획에서부터 사는 모습까지 손중선의 모든 게 의혹 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본 자신의 직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학자금을 마련하려면 돈이 필요할테고 달리 재주가 없으면 돈이 될만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저질렀을 가능성도 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아무리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도 눈앞에 돈이 보이는데 그냥 모른척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노리는 작자들이 지천에 널렸다는 건 이번에 연구실 괴한 침입에서도 증명된 사실이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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