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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37회> - 납치 감금, 그리고 손중선의 자치방

writerjang 2023. 1. 24. 21:04

  손중선의 친구인 척 주인집여자의 양해를 구해 그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방은 자물쇠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요즘 보기드문 자취방이었다. 방은 한낮인데도 전등을 켜야 할 정도로 어두웠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방은 매우 단출했다. 컴퓨터도 한 대 없었고 박사의 방 답지 않게 책도 몇 권 없었다.

 

  여기가 진짜 손중선의 방이 맞는가, 또 다른 곳에 그가 진짜로 살고 있는 집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가까이 접근할수록 의혹만 점점 불어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형사는 방 구석구석을 눈길 가는데로 살펴봤다. 아무리 총각이라지만 이렇게 살림살이가 없을 수 없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살림도구도 아예 없을 뿐만 아니라 음료수를 저장할 냉장고 조차 없었고, 뭘 가지고 사는지 모를 정도였다. 마치 피난온 사람처럼 임시로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형사는 방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책상 한쪽 끝에 놓인 은행통장에 눈길이 멎었다. 비닐 케이스 안엔 각각 다른 은행의 통장 세 개가 들어있었다. 하나씩 펼쳐보았다. 첫 번째 것은 급여통장이었다. 매달 국립 과학연구소의 송금으로 적지않은 월 급여가 입금된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입금일로부터 며칠 사이에 모두 인출해 잔고는 별로 없었다.

 

  다음 것은 적금통장이었다. 매달 30만원씩 32개월 동안 부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건 그게 손중선 자신의 적금통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예금주는 오주희라는 이름이었다. 조형사는 손중선의 애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 번째 통장은 일반 예금통장이었다. 이 통장엔 금년 225일 자로 단 한 번 입금한 기록이 있는데, 액수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무려 3억원. 조형사는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손중선이 유학 가기 위해 모은 돈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뻔한 월급으로 이런 큰 돈을 모을 수 있었다는 데 대해 조형사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통장 케이스에는 도장이 한 벌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주희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까 두 번째 열어본 타인 명의의 통장을 손중선이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조형사는 압수수색영장도 없는 상태에서 통장을 가져가는 건 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통장을 다시 본래의 위치에 놓아두고 방안을 좀 더 자세히 둘러봤다. 더 이상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벌써 오후 5시가 넘었다. 조형사가 방에 들어온 지도 이제 한시간이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그 때까지도 손중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형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오늘 꼭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고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냥 시간만 죽이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로 돌아가 반장에게 보고하고 대책을 세우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이 섰다.

 

  조형사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주인집여자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조형사가 혹 도움이 될 만한게 있을까 해서 주인여자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친구가 갈 만한 데가 없을까요, 오늘 꼭 좀 만나야 하는데."

  "글씨...... 걸 내가 워찌 알겠쑤. 보통 직장에 출근하믄 저녁 느즈막히 돌아오는디."

  "주말엔 그럼 집에만 있습니까?"

  "아니여, 갱일날두 자주 나가는 편이지라. 통 집에 붙어있는 걸 본 적이 없응께."

  "그럼 주말엔 출근할 일도 없을테고, 어디 간다는 얘기 들으신 적은 없나요?"

  "근 걸 일일이 야그해주는 성격이든가, 그 총객이?"

  "네에...... 그렇지요." 

 

 

  주인여자는 여기까지 고분고분 얘기해주더니 조형사를 다시 자세히 쳐다보는 눈치였다.

  "친구람서 외려 나보다 아는 거이 별 없네?"

  "? 저도 오랫동안 그 친구를 못만났거든요."

  변명을 하는 조형사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원래 조형사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체질이었다. 수사를 하다보면 변칙을 사용해야 할 때도 많았지만 조형사는 웬만하면 정공법으로 밀어부치는 편이었다. 

 

  "총객헌테 뭔 일이라도 생겼남요?"

  "아니,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내동 코빼기도 비지 않던 친구덜이 오늘은 이 험한 곳까정 찾아오고 그런다냐?"

  "누가 또 찾아왔었나요?"

  "좀 전에 한 사람이 댕겨 갔지라."

  ", 그래요?"

  누굴까? 누가 이곳까지 왔다간걸까? 주인여자 얘기는, 그동안은 친구들이 찾아온 적이 없었는데 유난히 오늘만 친구들이 찾아온다는 거였다.

  "누군지 혹시 모르시나요?"

  "누긴 누구여, 총각 친구제."

  "아니, 그거 말구요. 그 사람 이름이라든가, 뭐 그런 거 말예요."

  ", 내가 걸 일일이 물어볼 이유라도 있당가?"

  "아니요, 그럴 필요 없으시겠죠. 그건 됐구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세요, 그 친구가 갈만한데가 없는지."

 

  주인여자는 조형사의 말을 듣고는 골똘히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 그 총객이 갈 만한 데가 딱 한 군데 있구만이라. 갱일만 되면 보따리를 잔뜩 싸들고 나갈길래 원젠가 내가 한 번 물어봤제. , 그랬더니 글씨 고아원에 간다 글데? 아 그래, 참말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인갑다, 하고 생각해왔제. 이른데 살믄서 글기가 워디 쉬운감?"

 

  조형사는 드디어 얘기 보따리가 풀렸구나, 하고 생각하며 내친김에 마저 풀어놓으라는 듯 맞장구를 쳐줬다.

  "그렇죠. 그 친구가 원래 마음이 착한 사람이예요. 그런데, 아주머니! 이 친구가 어느 고아원을 방문하고 있는지는 아시나요"

  "글씨, 이름은 몰고 광명시 워디쯤이란 야근 들었는디. 아침에 나가선 밤늦게야 들어옹께. 원젠가는 한 번 고아원이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냐고 물었더니 광명시라고 야그하드라고."

  "아 네...... 광명시요?"

  "근데 증말 친구분 맞어라?"

 

  조형사는 당황스러워졌다. 주인여자가 자꾸 의심이 커져가는 것 같아서였다. 형사라는 걸 들켜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아직 손중선을 범인으로 단정짓기엔 뚜렷한 단서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손중선이 경찰에서 자기를 조사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수사에 유리할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조형사는 주인여자의 의심을 떨쳐내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주머니도 참. 친구니까 이렇게 여기까지 찾아왔죠!"

  "그라요? 하기사 그라겠제."

 

14: 협박

 

  곽부장의 명령으로 손중선의 머리에 씌워진 보자기가 벗겨진 건 그가 납치되고 나서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그는 광명시 천사의 집 앞에서 괴한들에게 붙잡혀 정신을 잃고 차안에서 1시간쯤 혼절해 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도 여전히 차는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의 교통혼잡을 빠져나가느라 시간이 마냥 지체되고 있었다. 바깥 도로의 차량들의 소리로 봐서 서울시내 한복판쯤 되는 것 같았다. 손중선이 깨어났는데도 그들은 말 한마디 없었다. 그도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차는 어느 건물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멈췄다. 차문이 열리고 덩치들이 양쪽에서 손중선의 팔을 붙들고 이끌었다. 육중한 철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모두 그곳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어 철창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손중선은 의자에 앉혀졌다. 손중선의 머리에 씌워진 보자기는 그제서야 벗겨졌다.

 

  그곳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어두컴컴한 지하 창고였고 천장 한가운데 매달린 60와트짜리 백열전구 하나만이 칠흙같은 어둠에 맞서 반짝이고 있었다. 손중선은 두 시간만에 빛을 봐서 그런지 그 엷은 불빛에도 눈이 부신지 눈쌀을 찌푸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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