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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39회> - 이단비의 입에서 나온 이름 오혜진

writerjang 2023. 1. 26. 02:23

15: 사랑

 

  동찬은 오늘 정박사 컴퓨터에서 많은 내용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의 일기는 '포에버 21'에 관련된 내용이라기 보다는 대부분 개인적인 얘기들이었다.

 

  '이단비'라는 제자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고 어디선가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정박사의 컴퓨터에서 프린트한 일기장 내용을 생각하며 운전을 하던 동찬이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수사회의 때 양형사가 그랬었다. 정박사의 외도 대상이 대학 제자였다고. 동찬은 양형사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장이 알려준 형사들의 연락처엔 양형사만 개인 휴대폰이 없었다. 호출기에 메시지와 전화번호를 남겼다. 잠시후에 응답이 왔다.

 

  ", 서동찬입니다."

  "양동은입니다만, 방금전에 제게 호출하셨습니까?"

  ". 다른 게 아니라, 정박사의 내연의 여자는 만나봤나요?"

  "아니요 아직...... 연락처만 알아놓았습니다."

  "그래요......?"

  동찬은 잘 됐다 싶었다. 자기도 한 번 봐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뭐라고 나왔나요?"

  "이름은 아직......"

  "정박사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찾아본다고 했었나요?"

  ", 전화번호를 몇 개 추려놓기는 했는데 어떤 게 그 여자 번호인지는 아직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 번호 중에 혹시 '이단비'라는 이름이 있나 살펴보세요."

 

  동찬의 얘기를 듣고 양형사는 아까 적어둔 이니셜 중에 'DANBEE'라고 쓰여진 것이 떠올랐다. 무슨 술집 이름으로 생각했던 게 바로 그 여자의 이름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단비라고 그러셨습니까?"

  ", 그래요."

  "그런 이름이 있습니다. 물론 영문으로 이니셜이 되어 있지만......"

  "지금 그 번호로 전화해서 약속을 잡고 내게 연락해 주세요. 나도 나갑니다."

  ", 알겠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양형사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30분 뒤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는 얘기였다.

 

  동찬은 핸들을 대학로로 꺾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도로에는 차들이 몰려나와 시간내에 도착하기는 좀 버거웠다. 동찬이 카페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 5분이 지난 뒤였다.

 

 

  카페에 들어서자 양형사와 20대 여인이 자리에 앉아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분홍 손수건을 손에 들고 눈물을 훔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박사의 죽음에 대해 이제서야 얘기를 전해 들은 것 같았다.

 

  동찬이 나타나자 양형사가 그녀에게 동찬을 소개했다. 정박사의 일기에는 처음부터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찬도 그녀가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선가 꼭 본듯한 얼굴이었다. 쌍꺼풀은 없었지만 작지 않은 눈과 오똑한 코, 그리고 앵두같은 입술.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이란 표현이 알맞은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영화배우도 아니고 얼굴을 팔고 다니는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동찬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혹시...... 어디선가 절 본 적이 있지 않나요?"

 

  동찬의 느닷없는 질문에 여자는 눈물을 훔치던 손수건을 치우고 동찬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요, 전 전혀 기억이 없는데요."

  그녀는 동찬의 질문에 주저없이 대답했다. 희한한 일이었다. 정박사 일기에도 그렇게 쓰여있었고 또 동찬도 지금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낯설지가 않은 건 무엇 때문일까? 하기야, 사람이 살다보면 비슷한 얼굴도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누가 봐도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던 것 같은 얼굴도 가끔 있긴 하니까.

 

  "정박사님 소식은 들으셨죠?"

  "......"

  동찬이 정박사 얘기를 꺼내자 여자가 또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정말 정박사를 어지간히 사랑했던 모양이었다.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볼게요?"

  ", 그러세요. 흐흑......"

 

  여자가 울거나 말거나 동찬은 질문을 퍼부었다. 얘길 하다보면 울음은 저절로 그치게 되어있다는 걸 동찬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나요?"

  동찬은 정박사 컴퓨터의 암호 '12051963'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물론 이렇게 어린 아가씨가 1963년생 일리는 없었겠지만 어떤 연관성을 찾을까 싶어서였다.

  "74614일생이예요."

  출생년도는 고사하고 생일 날짜도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혹시 정박사가 아가씨를 ''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나요? 영문으로 'J I N' 일수도 있고."

  "아니요, 저를 그렇게 부르시진 않았어요. 교수님은 저를 제 이름 그대로 단비라고 부르셨어요."

  여자는 이제 울음을 그치고 또박또박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럼 혹시 아가씨가 누굴 닮았다든가, 뭐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나요?"

  "글쎄요...... ! 그런 적이 한 번 있었어요. 아주 오래전 일이예요. 그러니까 제가 대학 3학년이었을 때, 학기초 어느 날이었어요. 수업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교수님이 잠깐 보자고 하셔서 그 날 따로 뵈었는데, 제가 교수님이 알고 있는 누구와 많이 닮았다는 거예요. 혹시 그 여자의 동생이나 또는 친척이 아닌가 해서 알아보시려고 남으라고 하셨다더군요."

  "그래서요?"

  동찬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교수님이 이것저것 물어보셨지만 저하고 그 여자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찾을 수 없었던지 결국 실망하시더군요."

  "혹시 그 여자 이름은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 땐 말하지 않으셨는데, 교수님이 나중에 몇 번 은연중에 그 이름을 부르신 적이 있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름이 뭔데요?"

  동찬과 양형사가 동시에 상체를 커피탁자 건너편에 앉은 여자쪽으로 바싹 들이밀었다.

  "혜진이었어요. 오혜진."

  오혜진? 그러니까 정박사 컴퓨터에 있는 파일이름 'JIN'은 결국 오혜진의 이름 끝자를 영문으로 적은 것이 된다. 그래서 일기가 온통 그 여자에 관한 얘기로 가득했었던 거였다.

 

  "그럼 이단비씨는 그 오혜진이란 사람의 연락처나 주소지에 대해 알고 있나요?"

  "아니요. 전 전혀 몰라요. 그 뒤론 교수님도 그 여자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어요."

 

  여자는 오혜진에 대해선 더 아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동찬은 이쯤에서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박사를 가장 최근에 만난 날이 언제였나요?"

  "한 일주일 전 쯤이었어요."

  "일주일이나 됐다구요? 정박사와 자주 만나진 않았나보네요?"

  ", 그래요. 교수님이 학교에 계실 때완 달리 수성그룹 연구소로 옮긴 뒤로는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려우셨나봐요."

  ", ......"

 

  동찬은 더 이상 이 여자에겐 알아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혜진이란 인물에 대해 들은 것만해도 소득은 꽤 컸다. 정박사 주변인물에 대한 수사가 성큼 진전된 느낌이었다. 이 때 양형사가 질문에 나섰다.

  "정박사가 최근에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까?"

  "아니, 일주일 전에도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어요."

  "이단비씨는 28일 저녁에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28일이면 2월 말일인데, 그 날은 저희 엄마 생신이라 수원에 내려가 있었어요."

  "그래요? 어머님댁 전화번호는......"

 

  양형사가 전화번호를 요구하자 여자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전화번호를 또박또박 읊었다. 양형사가 수첩에 번호를 받아적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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