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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40회> -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온 20대 남자

writerjang 2023. 1. 26. 10:43

  양형사의 질문이 계속됐다. 이단비는 담담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주변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뇨, 전혀 없어요."

  "정박사 부인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 그 분이 저희 관계를 알고 계셨나요?"

 

  여자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오히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낯을 붉히며 양형사에게 반문했다. 양형사는 여자의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잠깐 실례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찬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아무런 대화가 없으니까 오히려 어색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동찬이 노트북컴퓨터 가방속에서 아까 정박사 연구실에서 프린트한 일기를 꺼내 읽었다.

 

  '최근들어 이상하게도 꿈에 JIN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벌써 12년이 지난 일인데 아직도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그녀가 떠나질 않았는가 보다. 모든 게 나의 업보려니 하고 살자. 차마 몹쓸 짓을 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다 우리의 운명인 것을.......'

 

  정박사가 암호로 쓴 생년월일이 오혜진이란 여자의 것일 확률이 높아졌다. 그의 일기에는 12년이 지난 일이었고 아직도 그녀가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다고 했다. 글귀로 봤을 때 피치못할 사정으로 헤어진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와 아주 꼭 닮은 이단비라는 여자와 내연의 관계를 맺을 정도로 오혜진은 정박사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여인이었을 것이다. 고이 간직하고픈, 잊을 수 없는 옛 연인에 대한 그림움 같은 것.

 

  양형사는 카페 한쪽 구석에 위치한 전화부스에 들어가 방금 전 이단비가 불러준 전화번호대로 다이얼 단추를 눌렀다. 벨이 울리자마자 상대방이 수화기를 들고 응답했다. 확인이 끝났다.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양형사가 다시 자리에 돌아와 앉기까지는 10분 정도가 소요됐다. 동찬과 이단비는 그 때까지도 멀뚱멀뚱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양형사가 동찬에게 말했다.

  "더 하실 말씀 남았습니까?"

  "아니요. 됐어요."

  "네에. 이단비씨! 오늘 협조 고마웠습니다."

 

  "...... 그런데 영안실은 어디죠?"

  이단비가 정박사가 안치된 영안실 위치를 물었다.

  "찾아가 보실겁니까?"

  양형사가 반문했다.

  "아니요, 그냥......"

  양형사는 잠시 멈칫했다.

 

  "H대병원이예요."

  동찬이 그녀에게 병원 이름을 알려줬다. 그녀가 그곳을 찾아가건 말건 그건 상관할 바 아니지만, 그녀도 정박사가 안치된 영안실 정도는 알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불륜이었을 망정 두 사람에겐 애틋한 사랑이었을테니까.

 

 

16: 탈취

 

  반장은 서장과 임과장에게 불려다니며 수사 진척상황에 대해 브리핑하느라 녹초가 됐다. 서장이 어찌나 닦달을 하는지 혼이 다 빠져 달아날 지경이었다. 서장은 특유의 '알아서 기는 체질' 때문에 중대한 사건이 터지면 위에서는 그다지 보채지도 않는데 혼자서만 길길이 날뛰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서장 밑의 간부들만 괴로웠다. 오늘도 예외없이 임과장은 물론이고 노반장까지 서장에게 불려다니며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이럴 땐 눈에 안보이는 게 상책이다 싶어 반장은 서둘러 외출준비를 했다. 행선지를 정하지도 않고 우선 밖으로 나가고 보자는 생각에 수첩을 챙기고 외투를 막 걸쳤을 때였다.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사람들이 없어서 그런지 전화벨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과장이 자리에 있었으면 전화를 받아야 하는 수고로움은 면할 수 있었는데 과장은 여전히 서장에게 붙들려 있는 모양이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아무리 작전회의를 해봐야 형사들이 일선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서장은 왜 깨닫지 못하는 지 모르겠다.

 

  ", 형사괍니다."

  "......"

  전화를 건 상대방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반장이 송화구에 대고 소리를 쳐봤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고 전화가 끊어진 것도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장난질이야!"

  반장은 평소 화를 잘 안내는 성격인데 오늘은 전화에다 대고 벌컥 화를 냈다. 서장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 외출하려던 참에 걸려온 전화였기 때문에 달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막상 전화를 받고보니 장난전화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반장의 비위가 뒤틀렸다. 반장은 화를 내면서도 수화기는 계속 들고 서 있었다. 형사과에는 중요한 전화가 자주 걸려오기 때문에 누구든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함부로 끊지 않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도 상대가 아무 말이 없는데 더는 그냥 들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반장이 수화기를 막 내려놓으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 때 상대방이 말을 시작했다.

  "......"

  전화를 건 상대방은 남자였다. 20대 청년의 목소리였다. 반장이 답답했던지 말을 재촉했다.

  ", . 말씀해보세요!"

  ", 다름이 아니라 거기가 수성그룹 연구소 살인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서 맞습니까?"

 

  장난 전화로만 알고 건성으로 듣고있던 반장은 상대방의 첫마디에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오히려 이번엔 반장의 입이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 그런데요?"

  반장은 대답을 하면서 습관처럼 전화기의 녹음 단추를 눌렀다.

 

  "...... 제가 그 일에 대해서 상의드릴 게 좀 있는데 담당자를 만나뵐 수 있을까요?"

  ", 물론이죠. 편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시죠."

  "그럼 5시 반에 남영동 사거리에 있는 '거리의 악사'로 나와주시겠어요?"

  ", 그러죠. 그런데 선생님의 성함이라든가, 인상착의라도 알려주셔야......"

  "저는 김성운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상대편은 자기 이름만 짧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시작은 뭔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대체적으로 차분하게 자기 의사를 전부 표현하는 편이었다. 반장은 상대가 만나서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용건이 확실한 걸 보면 장난전화는 아닌 게 분명하고, 살인범은 더더욱 아닐테고....... 이번 사건과 관련된 뭔가를 제보하려는 것 같은데, 망설이고 있는 눈치라는 걸 감안하면 범행과 관련돼 있지만 자신과 아주 가까운 주변사람의 이야기라든가, 아니면 자신이 목격한 걸 얘기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장은 우선 아무 목적없이 무조건 외출하려 했다가 건수가 생겨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5시 반이면 이제 40분 정도가 남았다. 제보내용이 궁금해 서둘러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대번에 약속장소를 남영동이라고 정한 것은 분명 그가 그곳과 어떤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집이나 직장 근처가 아닐까? 이런 대낮에 그곳에서 만나자고 한다면 직장 근처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에겐 모든 게 그냥 허투루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반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어떻게 차를 몰고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눈 따로 머리 따로, 그리고 손발이 다 따로 놀았다.

 

  반장이 약속장소인 남영동 '거리의 악사'에 도착한 것은 525분쯤이었다. 약속시간 5분전이었다. 이 정도면 체면은 섰다. 반장은 커피숍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의 후끈한 열기가 차가운 얼굴에 확 와닿아 화끈거렸다.

 

  반장은 카운터에 자기를 찾는 손님이 없었는가 물어보려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가 누군지는 상대방에게 말하지 않은 게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조용한 커피숍에 와서 내가 경찰입네 하면 괜히 이목만 집중시켜 불편하게 될 것이 염려돼 선뜻 이렇다하게 말을 하지 못하고 카운터 앞에 서서 잠시동안 종업원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반장을 가만히 쳐다보던 카운터의 여자 종업원이 반장에게 말을 붙였다. 아주 친절하게.

  "손님, 누구 찾으시는 분이 계신가요?"

  ", 그렇긴 한데......"

  반장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역시 직업은 속일 수 없는가 보다.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서 있기만 하는데도 다른 손님을 찾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맞추는 걸 보면 쪽집게가 따로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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