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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52회> - 괴한들이 일으킨 고의적인 충돌사고

writerjang 2023. 2. 12. 23:19

  "아 맞다. 용산모임은 이익단체가 아니지요?"

  "사실은......욕심이 생기긴 했는데, 회장님과 제가 용산모임의 간부라 맘대로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어떻게 저희에게 보내졌는지 이유를 알 수도 없었고. 그런 고민에 빠져있는 중에 CD를 빼앗겨버린 거예요. 이젠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게 됐어요?"

  "CD가 배달되고 난 뒤 강탈당하기까지 삼일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프로그램을 만지거나 본 사람이 또 없었나요?"

  "제가 알기론 없었어요. 회장님이 보관하고 계셨는데 모임 사무실 회장님 책상에 넣은 뒤 꺼내는 걸 보지 못했거든요. 전체회의 안건으로 올릴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렇게 되면 얘기가 밖으로 새나가게 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럼 잃어버리고 난 뒤에 신고하셨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회장님이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고 하시는 걸 제가 뒤탈이 생길까봐 몰래 알렸어요. 그 때 반장님이라고 하시는 분한테."

  ", 잘 알겠어요."

  정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김성운과 더 얘기 해봐야 나올 게 없다고 판단했다. 전자상가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봄바람이 불어와 온몸의 열기를 식혔다. 이젠 전자상가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찬은 용산모임의 회장인 구영수를 만났다. 구영수는 용산에서도 규모가 큰 업체의 사장이었다. 회장은 경찰에 제보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CD가 용산모임으로 우송되고 난 뒤의 얘기를 차분하게 진술했다.

 

  "처음엔 그 CD에 담긴 프로그램이 수성연구소에서 개발한 건지 몰랐어요. 그래서 저희는 이게 바로 하늘이 돕는거로구나, 하고 우리 연구에 참고자료로 삼으려고 했었죠. 보안상 국장과 저만 알고 있기로 약속하고 대신에 두 사람은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모임에 있는 제 책상서랍에 넣어뒀죠. 국장도 서랍열쇠를 가지고 있으니까 언제든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있죠. 물론 그 이후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구요. 아무튼 그러던 중에, 강도를 당한 날은 이상하게 제 가게에서 그 CD를 보고 싶더라구요. 사실 저는 용산모임 사무실엔 자주 들르긴 하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는 형편이거든요. 그래, 그 날 저는 그 CD를 참고하려고 저희 가게로 가져오던 중이었어요."

  "그럼 괴한들에게 빼앗긴 CD가 원본이 맞나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요?"

  "혹시 복사해둔 게 없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예요. 보관을 위해서는 복사해둘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니요, 전 복사한 적이 없어요."

  ", 잘 알겠어요."

 

  동찬은 곰곰이 생각해봤다. 일단 CD는 원본을 강탈당했다고 봐야만 했다. 연구소의 '포에버 21'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마당에 멀쩡한 프로그램 CD가 어딘가로 흘러갔다면 우선 그것을 찾는 일이 급하게 됐다. 특정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포에버 21'을 강탈해갔다면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컸다. 만일 눈앞의 이익만을 취하려고 프로그램을 외국에 넘길 경우 정보통신산업 강국을 꿈꾸던 우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아직은 그래도 훼손되지 않은 프로그램이 국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건 어쩌면 불행중 다행인지 모른다고 동찬은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동찬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오피스텔로 돌아가 팩스를 확인해야만 했다. 오혜진과 오남수. 그들 남매를 찾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14명의 명단에 달려있었다.

 

  정형사는 전자상가를 빠져 나가기 위해 주차장에서 차를 빼 출구쪽으로 나가는 길로 들어섰다. 주차장을 돌아 나가게 되어 있는 길을 따라 게이트에서 요금을 계산하고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두 갈래 길에 이르자 한쪽 방향이 막혀 흐름이 둔한 것을 보고 정형사는 핸들을 꺾어 우회전을 해 빠져나갔다. 순탄하게 흐르긴 했지만 이쪽은 청량리경찰서와는 반대쪽, 그러니까 한강대교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우선 갈 수 있는데까지 가보고 차를 돌릴 생각으로 계속 직진했다. 길은 아주 한산했다.

 

 

  길을 따라 시속 40킬로미터로 일차선을 달리고 있는데 반대 방향에서 마주오던 청색 소나타 승용차가 갑자기 중앙선을 넘어 돌진해왔다. 아까 그 차였다.

 

  순간 정형사는 아까 사고가 날 뻔 했던 일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경찰인 자신이 지금은 테러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경찰에게 테러를 가하려 하다니,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겁이 덜컥 났다. 아무리 경찰이라해도 위기에 처하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경찰생활 3년에 이런 테러를 맞은 경험이 그녀에겐 없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정형사는 재빠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우측 길로 비껴났다. 그러나 이번엔 대형 덤프트럭이 느린 속도로 달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로가 한산했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마터면 트럭의 꽁무니를 그대로 들이받을 뻔했다.

 

  정형사는 아찔해지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왼쪽 차선으로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그때 뒤쪽에서 돌진해오던 회색 그랜저 승용차가 정형사의 소형차 왼쪽 옆구리를 힘껏 들이받았다.

  "꽈광!!"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마음이 급해 미처 백미러를 확인해볼 틈도 없이 차선을 넘나들다 급기야는 일을 당하고야 만 것이다.

 

  거대한 덩치들 앞에 약하디 약한 소형차는 맥없이 오른쪽 갓길 바깥으로 밀려 나동그라지고 정형사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회색 그랜저는 그대로 길을 따라 유유히 사라졌다.

 

  동찬은 한강대교쪽으로 방향을 잡고 차를 몰아가다가 백여미터 앞쪽에서 추돌사고가 발생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난폭한 운전자들의 차량이 뒤엉켜 중간에 끼인 차량이 들이받히는 사고였다. 위태위태한 장면을 보며 '어어!' 하고 입에서 놀란 소리가 튀어나오는 순간 차들이 뒤엉켜 끝내는 추돌사고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받힌 차는 갓길로 밀려나 쳐박혔다. 뒤에서 들이받은 차는 그대로 뺑소니를 쳐 버렸고 그 뒤를 이어 사고 원인을 제공한 반대편 소나타가 동찬의 차와 엇갈려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렸다. 동찬은 손쓸 틈이 없었다.

 

  동찬은 우선 피해자를 살펴보기 위해 갓길 뒤편에 차를 세워두고 사고차량으로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얼핏 보니까 사고차량은 뒷 범퍼가 떨어져 나가고 트렁크부분이 조금 밀려들어간 정도였다. 인명피해는 없을 것 같았다. 길가엔 차가 받힐 때 뒷문이 열리면서 차안에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튀어 나와 있었다. 여자의 물건들이. 그런데 그 중에 경찰 경광등이 눈에 들어와 동찬을 놀라게 했다.

 

  차 안에는 여자 운전자가 핸들에 고개를 파묻고 기절해 있었다. 피도 흘리지 않았고 상처도 없었다. 앞부분은 멀쩡했다. 가벼운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보였다. 차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리고 운전자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괜찮으세요?"

 

  어깨를 짚고 몇 번 흔들자 여자가 깨어났다. 다행히 정신은 멀쩡한 것 같았다. 여자가 부시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예요?"

  그런 와중에도 정형사는 경찰이 당했다는 사실이 창피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이 고의적으로 달려들었어요. 아까도 한 번 위기를 넘겼었는데 그냥 무심코 지나쳤거든요."

 

  정형사는 일어나 차 바깥으로 나오려 했지만 기운이 없는지 움찔거렸다. 몇 번을 시도해봤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동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동찬은 왼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험한 직업을 가진 사람 같지 않게 유난히 뽀얀 그의 손은 가늘고 길었다. 정형사는 문득 그가 고생을 모르고 자라난 부잣집 아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괜찮......."

  정형사는 몇 번 사양해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마지못해 동찬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 얹었다. 바깥의 쌀쌀한 기온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손은 아주 따뜻했다. 손을 맞잡는 순간 정형사의 몸엔 전류가 흐르듯 동찬의 체온이 가슴 속까지 전해져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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