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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포에버 21

포에버 21 <54회> - 피의자 신분으로 취조를 받는 손중선

writerjang 2023. 2. 14. 00:53

23: 닮은꼴

   

  취조실엔 조형사와 양형사가 번갈아 들어가며 손중선을 취조했지만 시원한 진술을 받아내지 못했다. 사건 정황과 증거물들을 거론하며 당신이 범인일 수밖에 없다고 위협도 해봤지만 손중선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 이번엔 반장이 들어가 직접 신문했다.

 

  반장이 조용히 얘기를 꺼냈다.

  "우리 다시 차분하게 얘기해 봅시다. 그 날 당신은 연구실에서 뭘 하고 있었소?"

  "연구원이 연구실에서 뭘 하겠어요? '포에버 21' 때문에 정신이 없어 그동안 못한 다른 작업을 좀 했어요."

  "정박사가 그 날 야근한다는 건 알고 있었소?"

  "그야 당연하죠. 팀장이 야근을 하는데 그걸 모르는 연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좋아요. 그럼 당신은 몇 시에 퇴근했소?"

  "새벽 1시쯤이었어요. 교수님하고 같이 퇴근하려 했는데,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먼저 나갔어요."

  "당신 통장에 입금된 3억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때 조형사가 취조실로 들어와 반장 뒤편에 섰다. 손중선은 숨을 깊이 들이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건 태산에서 프로그램을 넘겨받으려고 저하고는 상의 한마디 없이 일방적으로 보내온 거였어요. 포석이었죠. 저는 그 때까지도 그들에게 프로그램 건에 대해 확답을 주지 않았어요."

 

  그 때 조형사가 끼여들었다.

  "이것 봐! 당신이 승낙하지 않았으면 그들이 거저로 그런 거금을 줬겠어?"

  "......"

  조형사는 답답했는지 자기 가슴을 치며 목청을 돋구웠다. 그와는 말이 안통한다는 표현으로 손중선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반장이 계속 신문했다.

 

  "그럼 그들과 거래할 의사가 있긴 있었나?"

  반장의 목소리는 대체적으로 낮고 차분했다. 반장의 신문에는 그나마 손중선도 고분고분 대답하는 편이었다.

  "갈등했지만 결과적으로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거래를 할래야 할 수가 없게 됐잖습니까?"

  "그래요? 그럼 프로그램이 멀쩡했으면 당신은 거래를 할 의사가 있었다는 얘기네?"

  "그렇진 않아요. 거절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 때 또 조형사가 끼여들었다.

  "거절할 생각 좋아하시네. 이것 봐! 당신이 복사한 CD가 지금 시중에 나돌고 있어!"

  "그건 제가 모르는 일이예요. 몇 번을 말해야 제 말을 믿으시겠어요!"

  손중선도 조형사의 강압에 맞서 목청을 돋우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태산 곽현재가 다 불었어, 당신이 복사해준 거라고!"

  조형사가 거짓말을 보태가며 손중선을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손중선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그건 모함이예요. 난 그들에게 프로그램을 넘겨준 적이 없어요. 그리고 못쓰게 된 프로그램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니, 그래도 이 친구가?"

  조형사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지더니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반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이 유학을 가기로 했다는데, 그것도 미대쪽으로. 그러면 지금껏 살아온 건 모두 포기하는게 되나요?"

  "전 원래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어요. 이제서야 제 길을 가게 된 셈이죠. 이런 일이 있고 나니까 차라리 더 잘됐다 싶어요."

 

  반장은 더 이상 그를 신문할 근거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가 사건당일 현장에 있었다는 걸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게 없으면 조형사가 구해온 단서들 가지고는 반장과 조형사의 추리는 단순히 억지로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장이 취조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십분 뒤 조형사와 양형사가 다시 취조실로 들어갔다.

 

 

  카페를 나와 동찬의 차를 타자마자 정형사는 깜빡 잠이 들었다. 사고가 날 때 몹시 시달렸던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때문이었다.

 

  동찬은 정형사의 단잠을 깨울세라 도중에 차를 세울만한 장소를 찾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서울시내에는 길가에 차를 세울만한 여유있는 장소가 딱히 없었다.

 

  그러던 중 한강대교를 건너면서 고수부지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고수부지 한가운데 설치된 농구코트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서넛이 열전을 펼치는 풍경이 잡혔다. 학교수업을 마치자마자 달려왔는지 아이들은 농구대 밑에 가방과 웃옷을 벗어던져둔 채 늦겨울의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찬은 다리 끝에서 우회전을 해 고수부지 아래로 차를 몰아갔다. 진입로로 차를 몰아 들어간 뒤 터널 아래를 통과해 강변 옆으로 나란히 놓인 아스팔트를 따라 조용한 장소로 이동했다. 적당한 장소에서 차를 멈추고 시동을 껐다. 그 때까지도 정형사는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동찬도 눈을 감고 운전석 시트를 뒤로 반쯤 제끼고 누웠다. 눈을 감고 가면을 취하려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범인의 형상이 오락가락하며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20여분쯤 흘렀을까. 그 때 곤히 잠든 정형사가 몸을 뒤척이며 고개를 운전석 쪽으로 돌렸다. 바시락거리는 소리에 동찬이 눈을 떠 바라보니 여전히 정형사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자동차 의자가 좀 불편한 모양이었다.

 

  눈을 꼭 감고 잠든 그녀의 해맑은 얼굴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찬은 다시 야릇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연인처럼 그녀가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스물일곱 살의 과년한 여인의 얼굴에서 이렇게 해맑은 모습이 우러나온다는 사실에 동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동찬은 경이로움에 젖어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단정한 눈썹과 이마, 그리고 오똑한 콧날, 연분홍빛의 도톰한 입술로 옮겨가며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듯 마음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진작에 알아보지 못한 그녀의 미모를 지금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보며 새삼스럽게 놀라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동찬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그녀의 가슴을 슬쩍 훔쳐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딴전을 부렸다. 마치 자신의 응큼한 생각을 그녀에게 들켜버린 것처럼 쑥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금 한참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이었다.

  '아니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서른네 살의 노총각에게 이렇게 순수한 면모가 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는 아까 사고현장에서 경험했던 야릇한 느낌이 밀려와 자신이 자칫 실수를 저지를 뻔 했다고 자책했다.

 

  겉으론 마냥 바람둥이처럼 행동하곤 했지만 알고보면 그는 아주 순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제력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자기 자신을 억제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잠든 그녀의 미모 앞에 그의 자제력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찬은 그녀의 가슴을 다시 한 번 힐끔 훔쳐보고 난 뒤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도톰한 연분홍빛 입술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결심이 섰는지 그녀에게로 자기의 얼굴을 서서히 옮겨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동찬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며시 포개얹었다.

 

  이른 새벽 이슬에 젖은 촉촉한 분꽃의 촉감이 그의 전신으로 번져들어갔다. 짜릿한 전율이 그의 말초신경까지 전달돼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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