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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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글쓰기

자작소설 28

빛바랜 이력서 - 단편소설 -

후줄근하게 젖은 작업복 밑동을 꼭 쥐고 툴툴 털어냈다. 언뜻 보기엔 앞가슴에 들러붙은 먼지구뎅이를 털어내려는 행동으로 보였지만 정호의 의도는 딴 데 있었다. 두어 시간째 나르고 있는 한 컨테이너 분량의 박스를 퇴근 전까지 모조리 창고에 쟁여넣느라 온몸이 후끈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중국산 여행용 가방이 빼곡히 담긴 박스였다. 두 달 전에 선적돼 머나먼 뱃길을 달려온 컨테이너가 산페드로 부두에서 다른 회사 수입품에 엮여 쿼터 초과 시비로 싸잡아 걸려드는 바람에 무려 한 달 동안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오늘 간신히 빼내오긴 했는데 오후 네시쯤에야 겨우 풀려 이제사 창고까지 배달됐다고 한다. 물론 사장의 엄살섞인 넋두리를 귀동냥해서 알게된 정보였다. 사장은 부득이 퇴근시간이 늦어지더라도 몽땅 창고 깊숙이 쟁여넣..

단편 2023.01.17

포에버 21 <21회> - 간밤의 연구소 유린에 수사팀 비상

문이 열렸다. 복도에 설치된 녹색 비상등 불빛이 열려진 문틈을 비집고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경비원은 자세를 한껏 낮추고 안쪽으로 손전등을 한 번 휘익 돌려 비춰보았다. 손전등 불빛이 번쩍번쩍하며 연구실 안을 돌아 다니다말고 책상 위 컴퓨터 앞에서 멈췄다. 순간 잠수복은 '아차' 하고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후회했다. 컴퓨터 전원 내리는 걸 깜빡 한 것이다. 경비원은 문을 벌컥 밀어제치고 사주경계를 하며 안쪽으로 들어와선 딸깍, 하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잠수복은 몸을 벽에 더욱 밀착시켰다. 천장에 붙은 형광등이 제각각 깜빡거리다가 일제히 불을 환하게 밝혔다. 실내는 대낮처럼 밝아졌다. 경비원은 눈이 부신지 잠시 머뭇거렸다. 경비원이 다시 고개를 돌려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직 잠수복의 사나이를 발견하지 ..

장편/포에버 21 2023.01.13

포에버 21 <10회> - 사건현장 초동수사 후 첫번째 회의

"어떻게?" "책상 밑바닥엔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는데 자국이 그 위로 나 있더군요. 오래전에 생긴 자국이라면 먼지가 덮어버렸겠죠." "그래? 그건 아주 민완답게 잘 본거야." 반장이 자신에게 민완이란 칭호를 붙여주자, 조형사는 기분이 퍽이나 좋았는지 어깨가 으쓱해졌다. 반장 앞이건 말건 아예 후배형사를 큰소리로 불러가며 명령까지 했다. "사진기로 촬영까지 해뒀어요. 양형사, 이따가 그 필름 뽑아와!" "네....." "그러면 자넨 그 자국을 보면 범인이 누군지도 알겠네?" 그런데 이건 웬 비아냥거림인가. 다시 반장의 반격이 시작된 것일까? "아니, 저......" "그래서 자네는 문제야. 하난 알고 둘은 모른다고." 다시 반장의 꾸지람이 시작됐다. "그 자국을 보면 범인은 환기통으로 침입한게 아니잖아...

장편/포에버 21 2023.01.08

포에버 21 <9회> - 연구소 비상 연락처는 경찰청 특수과

초동수사를 위해 현장에 출동했던 반장과 양형사, 조형사와 정형사가 각각 짝을 이뤄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해 청량리경찰서로 이동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살해현장에 사체를 그대로 남겨두고 철수하는 일은 경찰생활 십년 만에 처음보는 일이었다. 조형사는 차를 운전하면서 내내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시라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고 먼저 정형사에게 말을 꺼냈다. "정형사, 아까 그 소장 아는 사람이야?" "아니요, 개인적으론 모르지만 그 사람 원래 유명하잖아요.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고. 우리나라 물리학에서는 최고의 권위자예요." "정형산 모르는 게 없어." "아녜요, 그냥 텔레비전을 자주 보다보니까......." 양형사가 운전하는 차를 뒤따라 가다 조형사는 회기 전철역..

장편/포에버 21 2023.01.08

포에버 21 <8회> - 경찰청으로 복귀한 동찬의 첫 출근

같은 시각, 5호선 마포 지하철역 앞. 청바지와 면티, 그리고 오리털 파카 차림의 30대 초반의 사내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와 느긋하게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엔 노트북 컴퓨터가 하나 달랑 들려 있었다. 이제 3월 1일. 이쯤 됐으면 날씨가 따뜻한 게 정상이 아닌가. 어제 공항을 빠져나올 땐 그래도 봄기운이 완연했는데 오늘은 추위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서초동 원룸 오피스텔을 나와 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지하의 푸근한 온기에 잠깐 녹는가 싶더니 마포역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오자 냉기가 엄습했다. 정오가 넘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도로 양편엔 눈이 쌓여 있었다. 곳곳에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지 인도를 걷는 행인들은 곡예를 하듯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팔을 젓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

장편/포에버 21 2023.01.08

포에버 21 <7회> - 갑작스런 현장 철수 지시에 당황한 강력반

조형사는 정형사에게 지문을 채취한 내용물을 받아 감식반 요원들에게 넘겼다. "나으리, 이거 빠짐없이 다 채취한거지?" 정형사가 '나으리'란 별명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감식반 형사들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상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우리나라 여자 이름들은 본래 하나같이 비슷하지만 정형사 이름은 좀 특이했다. 그녀는 한글이름이 유행하기에 앞서 신세대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지어준 부모들에게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리'라는 이름은 놀림감으로 사용되기에 충분한 어감을 가지고 있어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나으리'란 별명을 달고 다녔던 정형사는 어른이 되면 설마 점잖은 사람들이 그러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입사하자마자 ..

장편/포에버 21 2023.01.07

포에버 21 <6회> - 사건현장 초동수사에 나선 형사들

두 형사는 사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요를 걷어내고 자세히 살펴봤다. 오른쪽 뒤편 목부위에 칼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칼자국은 단 한 차례였는데도 치명상을 입고 숨이 끊어진 것으로 보였다. 겉보기엔 그밖의 외상은 없었다. 아마도 전문가의 솜씨가 아닌가 여겨졌다. 조형사는 정형사를 시켜 현장 주변의 지문을 빠짐없이 뜨도록 했다. 조형사가 좌중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시죠?" "네, 접니다만."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대답했다. "소장님이시죠?" 책상 위에 놓여진 머그잔을 조심스럽게 집어올리던 정형사가 중년의 사내에게 아는 체를 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조형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정형사와 중년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형사가 먼저 중년 사내에게 자기 ..

장편/포에버 21 2023.01.06

포에버 21 <5회> - 살인사건 보다 더 중요한 국책 프로그램

노반장은 언젠가는 최소한 한 번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마누라에게 멀쩡한 두부를 안겨줘야겠다는 생각을 늘상 하지만 좀처럼 현실은 마음 같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렇지만 아마 멀쩡한 두부를 사다주면 마누라는 또 잔소리를 늘어놓을게 분명했다. 멀쩡한 놈이나 조금 깨진거나 두부이긴 다 마찬가진데 쓸데없이 돈만 비싸게 주고 사왔다고. "아니지, 지금 쓸데없는 일로 기운 뺄 때가 아냐. 자네들은 어젯밤에 관내에서 살인사건 난 거 알고들 있나?" "수성그룹 연구소 박사 살인사건 말씀이시죠?" 정나리 형사가 눈치빠르게 대답했다. 역시 그녀의 눈치 하나는 천부적으로 타고 난 것인가 보다. "그래. 그런데 문제는 박사도 박사지만 그가 연구했던 프로그램 칩인가 뭔가가 문제라나?" 서장이 뭐라고 말하긴 했는데, 아까는 워낙 정..

장편/포에버 21 2023.01.06

국경의 총성 - 단편소설 -

"삐리리리!" 제임스는 창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다 말고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사무실에 걸려온 전화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방음시설이 미비한 낡은 건물이라 가끔 옆 사무실 전화를 자기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즘엔 하루 온종일 도통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삐리리리!" 두 번째 벨이 울렸다. 그제서야 제임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창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콧잔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오른손으로 쓸어올리며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재떨이에 담배를 잽싸게 비벼 껐다. 정말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요즘엔 일거리가 별로 없어 매일 한가하게 세월만 죽이고 있었다. LA 바닥에 이민브로커 사무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나..

단편 2023.01.05

매니저 - 단편소설 -

"띠이- 치이익 칙-" 인터폰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신호음 소리마저 잡음에 가까워 이젠 더 이상 누르기도 겁이 났다. 이미 수명을 오래 전에 넘긴 듯 인터폰은 안타깝게도 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워했다. 이삿짐을 싣고 온 짐꾼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벌써 한 시간째 이렇게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매니저는 아파트 사무실에 없는 게 분명했다. 이제 막 한 시간째에 접어들자 더 이상은 못 참겠던 지 짐꾼들 중 고참으로 보이는 자가 젊은 짐꾼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아주 빠른 스페인어로,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젊은 짐꾼이 차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다이얼을 재빠르게 찍어 눌렀다. 잠시 뒤 그는 유창한 영어로 이삿짐센터에 보고를 했다. 영어를 곧 잘 했다. 나를 ..

단편 2023.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