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가의 창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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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글쓰기

전체 글 65

포에버 21 <8회> - 경찰청으로 복귀한 동찬의 첫 출근

같은 시각, 5호선 마포 지하철역 앞. 청바지와 면티, 그리고 오리털 파카 차림의 30대 초반의 사내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나와 느긋하게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엔 노트북 컴퓨터가 하나 달랑 들려 있었다. 이제 3월 1일. 이쯤 됐으면 날씨가 따뜻한 게 정상이 아닌가. 어제 공항을 빠져나올 땐 그래도 봄기운이 완연했는데 오늘은 추위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서초동 원룸 오피스텔을 나와 전철역까지 걸어가면서 꽁꽁 얼어붙었던 몸이 지하의 푸근한 온기에 잠깐 녹는가 싶더니 마포역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오자 냉기가 엄습했다. 정오가 넘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도로 양편엔 눈이 쌓여 있었다. 곳곳에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지 인도를 걷는 행인들은 곡예를 하듯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팔을 젓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보였..

장편/포에버 21 2023.01.08

포에버 21 <7회> - 갑작스런 현장 철수 지시에 당황한 강력반

조형사는 정형사에게 지문을 채취한 내용물을 받아 감식반 요원들에게 넘겼다. "나으리, 이거 빠짐없이 다 채취한거지?" 정형사가 '나으리'란 별명을 아주 싫어한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감식반 형사들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상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우리나라 여자 이름들은 본래 하나같이 비슷하지만 정형사 이름은 좀 특이했다. 그녀는 한글이름이 유행하기에 앞서 신세대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지어준 부모들에게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리'라는 이름은 놀림감으로 사용되기에 충분한 어감을 가지고 있어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나으리'란 별명을 달고 다녔던 정형사는 어른이 되면 설마 점잖은 사람들이 그러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를 입사하자마자 ..

장편/포에버 21 2023.01.07

포에버 21 <6회> - 사건현장 초동수사에 나선 형사들

두 형사는 사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담요를 걷어내고 자세히 살펴봤다. 오른쪽 뒤편 목부위에 칼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칼자국은 단 한 차례였는데도 치명상을 입고 숨이 끊어진 것으로 보였다. 겉보기엔 그밖의 외상은 없었다. 아마도 전문가의 솜씨가 아닌가 여겨졌다. 조형사는 정형사를 시켜 현장 주변의 지문을 빠짐없이 뜨도록 했다. 조형사가 좌중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시죠?" "네, 접니다만."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대답했다. "소장님이시죠?" 책상 위에 놓여진 머그잔을 조심스럽게 집어올리던 정형사가 중년의 사내에게 아는 체를 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조형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정형사와 중년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형사가 먼저 중년 사내에게 자기 ..

장편/포에버 21 2023.01.06

포에버 21 <5회> - 살인사건 보다 더 중요한 국책 프로그램

노반장은 언젠가는 최소한 한 번쯤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마누라에게 멀쩡한 두부를 안겨줘야겠다는 생각을 늘상 하지만 좀처럼 현실은 마음 같지만은 않았다. 그도 그렇지만 아마 멀쩡한 두부를 사다주면 마누라는 또 잔소리를 늘어놓을게 분명했다. 멀쩡한 놈이나 조금 깨진거나 두부이긴 다 마찬가진데 쓸데없이 돈만 비싸게 주고 사왔다고. "아니지, 지금 쓸데없는 일로 기운 뺄 때가 아냐. 자네들은 어젯밤에 관내에서 살인사건 난 거 알고들 있나?" "수성그룹 연구소 박사 살인사건 말씀이시죠?" 정나리 형사가 눈치빠르게 대답했다. 역시 그녀의 눈치 하나는 천부적으로 타고 난 것인가 보다. "그래. 그런데 문제는 박사도 박사지만 그가 연구했던 프로그램 칩인가 뭔가가 문제라나?" 서장이 뭐라고 말하긴 했는데, 아까는 워낙 정..

장편/포에버 21 2023.01.06

국경의 총성 - 단편소설 -

"삐리리리!" 제임스는 창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다 말고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 사무실에 걸려온 전화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방음시설이 미비한 낡은 건물이라 가끔 옆 사무실 전화를 자기 것으로 착각할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즘엔 하루 온종일 도통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삐리리리!" 두 번째 벨이 울렸다. 그제서야 제임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창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콧잔등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오른손으로 쓸어올리며 책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재떨이에 담배를 잽싸게 비벼 껐다. 정말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였다. 요즘엔 일거리가 별로 없어 매일 한가하게 세월만 죽이고 있었다. LA 바닥에 이민브로커 사무실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생겨나..

단편 2023.01.05

포에버 21 <4회> - 살인사건에 혼란스러운 강력계의 아침

노반장은 뭐 준비할 것 없나,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사무실을 한 번 휘 둘러봤지만 선뜻 짚이는 게 없었다. 이럴 땐 숙직 형사라도 있어야 뭔가 알아보기나 할 텐데, 지금은 아무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어제 숙직이 아마도 양형사였을 거라 생각하며 맨 끄트머리에 있는 그의 자리로 가 봤지만 숙직일지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들고 나갔는가 보다. 아마도 사건사고 현황을 파악하러 상황실에 갔을 터였다. 할 수 없이 불안한 마음을 안고 서장실로 올라갔다. 3층 복도 끝에 있는 서장실이 평소와는 달리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마음으론 서장과 빨리 부딪히고 싶지 않은데 두 발은 바쁘기만 하다. 공직생활에서 단련된 두 다리가 제 스스로 윗사람의 호출을 알아보는가 보다. 17년 동안 서장실에 올라와 본 기억은 ..

장편/포에버 21 2023.01.05

포에버 21 <3회> - 서장 호출에 긴장한 노반장

2장: 비상 다음 날 아침 7시 27분. 밤새 멀쩡하던 날씨가 새벽부터 쌀쌀해지고 눈발이 한 두 가닥씩 날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알이 굵은 함박눈으로 변했다. 노형석 반장이 형사과 팻말이 붙어있는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바닥에 놓인 발판에다 구둣발을 탁탁 굴렀다. 몇번을 그렇게 같은 동작을 반복하더니 이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식 출근시간이 무려 1시간이나 남은 시간이었고, 특히 형사계 자체적으로 정한 8시 보다도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숙짖 형사도 자리를 비우고 어딜 갔는지 실내는 썰렁했다. 노반장은 출근시간 교통체증에 아둥바둥대는 게 싫어 새벽부터 서둘러 집을 나서곤 한다. 그가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이유는 그 뿐만이..

장편/포에버 21 2023.01.04

포에버 21 <2회> - 괴한 침입으로 얼룩진 연구실

정박사는 정신을 수습할 수 없었던지 창가를 마냥 서성거렸다. 한참을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는 다시 본래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우스로 아이콘 하나를 클릭했다. 컴퓨터 본체에 설치된 모뎀에서 다이얼톤이 카랑카랑하게 들려왔다. 연결음이 울렸다. 왼손으로 모니터 상단에 달린 카메라를 켜고 렌즈 위치를 조절했다. 화상통신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할까? 그에게 물어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심한 갈증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자타가 공인하는 그 좋은 머리도 점점 둔해져만 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굿 모닝' 하며 혀 꼬부라진 외마디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곧이어 화면이 깜빡거리더..

장편/포에버 21 2023.01.04

포에버 21 <1회> - 21세기 국가 발전 계획

1장: 감염 어둠에 휩싸인 연구실 창문으로 늦겨울의 싸늘한 달빛이 부딪히고 있었다. 컴퓨터 전문 서적으로 가득 찬 책장이 사방 벽면을 에두르고 있었고, 한쪽 귀퉁이에 놓인 캐비닛엔 활짝 열린 문짝으로 갖가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CD가 어지럽게 쏟아져 나와 있었다. 캐비닛 주변은 무언가를 찾으려 했는지 뒤죽박죽 흐트러져 있었다. 책상 끄트머리에 매달린 스탠드에선 흐릿한 불빛이 백열등을 흘러나와 서류철이 널부러진 책상 중심으로 모아져 두툼한 문서철 위에 머물렀다. '21세기 국가발전 계획'이라는 커다란 제목이 붙은 문서철. 어지럽혀진 연구실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정일준 박사는 이제 안정을 되찾았는지 컴퓨터 자판기만 빠른 손놀림으로 두드려대고 있었다. 그의 널찍한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재떨이엔 담배꽁초..

장편/포에버 21 2023.01.04

매니저 - 단편소설 -

"띠이- 치이익 칙-" 인터폰에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신호음 소리마저 잡음에 가까워 이젠 더 이상 누르기도 겁이 났다. 이미 수명을 오래 전에 넘긴 듯 인터폰은 안타깝게도 제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워했다. 이삿짐을 싣고 온 짐꾼들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벌써 한 시간째 이렇게 바깥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매니저는 아파트 사무실에 없는 게 분명했다. 이제 막 한 시간째에 접어들자 더 이상은 못 참겠던 지 짐꾼들 중 고참으로 보이는 자가 젊은 짐꾼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아주 빠른 스페인어로,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젊은 짐꾼이 차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다이얼을 재빠르게 찍어 눌렀다. 잠시 뒤 그는 유창한 영어로 이삿짐센터에 보고를 했다. 영어를 곧 잘 했다. 나를 ..

단편 2023.01.04

위장결혼 - 단편소설 -

어느 무더운 여름 오후, 언니는 아이보리색 블라인드로 햇볕을 모두 차단시킨 거실에 넋을 잃고 주저앉아 새까맣게 변색된 한쪽 눈에 달걀을 정성스럽게 문지르고 있었다. 에어컨도 없는 낡은 시민아파트의 거실은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의 사막기온을 견디다 못해 일그러진 플라스틱 모양으로 늘어져 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나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언니는 가냘프게 흐느끼며 달걀 쥔 손을 느릿느릿 원형을 그리며 놀리고 있었다.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목격한 나는 놀라움에 한참을 그렇게 장승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손찌검까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느닷없는 출현을 눈치챈 듯 언니는 어느새 끝이나지 않을 것 같던 손놀림을 멈췄고, 더 이상 흐느낌도 없이 적막만이 감돌았다. 아련히 꿈만같..

단편 2023.01.03